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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12. 2020

알지 못하는 사이 내게도 이런 여름이 있었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 리뷰

앞집에 살던 염장이는
평소 도장을 파면서 생계를 이어가다
사람이 죽어야 집 밖으로 나왔다

죽은 사람이 입던 옷들을 가져와
지붕에 빨아 너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던 날에는
속옷이며 광목 셔츠 같은 것들이
우리가 살던 집 마당으로 날아 들어왔다

마루로 나와 앉은 당신과 나는
희고 붉고 검고 하던 그 옷들의 색을
눈에 넣으며 여름의 끝을 보냈다

박준, '처서' 전문,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을 보고 난 후의 감상을 어떻게 정리할지 궁리해보는 중이다.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영화를 보는 동안 박준의 위 시를 떠올렸던 계기부터 써볼까. 여느 시들의 인용이 대체로 그러하겠지만 이 '처서'라는 시도 그 내용 자체보다는 담겨 있는 분위기에 착안했다. 마루에 앉아 저기 널려 있는 옷들을 바라보며 '아 여름이구나' 하고 중얼거려보는 일. 아니면 그 여름에 불던 바람이 따뜻한 바람이었는지 찬 바람이었는지, 습도는 어땠는지 같은 기억들.


여름이라는 계절을 기억하게 하는 요소에는 이런 것들이 있겠다. 내 경우로 한정하자면 그 계절의 한가운데보다는 다음 계절로 넘어갈 무렵, 그러니까 절기로 따지자면 입추보다는 처서가 더 알맞을 것이다. <남매의 여름밤>은 내게 백로의 무렵에 만난 처서의 영화 같았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영화의 시작은 떠나기 전의 아쉬움을 안은 채 머물던 방을 바라보는 '옥주'(최정운)의 모습, 그리고 나가자며 재촉하는 아빠 '병기'(양흥주)의 목소리, 그리고 이어서 어디론가 떠나는 다마스 차량 안이다. 차창 밖의 시점에서 각각 조수석과 운전석에 앉은 '옥주'와 '병기'를 <남매의 여름밤>은 잠시 지켜본다. (여기서 신중현이 작사/작곡한 '미련'의 영화 속 세 개의 버전 중 하나인, 임아영이 부른 곡이 한동안 흘러나온다.) 앞서 말한 '어딘가'는 '옥주'의 할아버지 댁이다. 이 가족은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할아버지 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아니, 적어도 '병기'는 그렇게 작정했다. '옥주'는 "할아버지한테 이야기는 한 거야?"라고 물어본다. 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한 후, 정확히는 여기서 잠시 지내도 되겠냐는 '병기'의 말에 콩국수를 먹던 할아버지 '영묵'(김상동)이 "그렇게 해라"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남매의 그 여름 이야기는 펼쳐진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어린 남매의 여름이기도 하고 어른 남매의 여름이기도 한 <남매의 여름밤> 이야기는 시나리오에 맞춘 로케이션으로서의 집이 아닌 집에 맞춘 시나리오를 통해 생생하게 관객들 저마다 지니고 있을 하나의 어떤 여름을 꺼내놓는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래된 가구들과 이층 집의 계단 가운데에서 '옥주'에게 작은 사적 공간을 허락해주는 미닫이 문, 아직 잘 돌아가는 재봉틀과 남향이어서 볕이 잘 드는 창문, 텃밭이 있어 고추나 포도 같은 것을 가족에게 허락해주는 마당. 낡은 자전거와 모기장.


<남매의 여름밤>과 같은 영화에 관해 말할 때 중요한 건 서사 자체가 아니라 매 순간 인물, 특히 '옥주' 같은 인물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의 흐름이겠다. 떨어져 지내는 엄마와의 일로 동생 '동주'(박승준)와 벌이는 작은 다툼, 쌍꺼풀 수술을 하고 싶지만 돈을 허락해주지 않는 아빠에 대한 서운함, 혹은 가족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새벽 할아버지 혼자 음악을 틀어둔 채 맥주를 따라놓고 거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 뒤의 마음 같은 것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남매의 여름밤>은 '옥주'의 시점으로 이 집에서, 이 가족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천천히 관찰하고 따라가되 가족 구성원 각자의 사연을 기계적으로 나열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흔히 아동이 주인공인 영화 속 어른의 전형 같은 것을 거의 따르지 않는다. 예컨대 아이가 원하거나 바라는 무언가의 대척점에서 그것을 간섭하거나 제한하는, 경우에 따라 적대적이거나 위협적인 모습이 <남매의 여름밤>에는 없다. 가족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주인공을 '성장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소비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집과 계절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인 것처럼 여겨진다는 표현이 알맞을까. <남매의 여름밤>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아이를 성장시키는 영화이기보다 그 유년의 한 계절, 수많은 여름 나날 중 나머지 모든 것들과 구별되는 바로 그 여름 하나를, 생생하게 스크린에 되살려놓는 영화이기를 택한다.


어린 남매어른 남매의 이야기는 서로 정서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가령 아빠 '병기'는 어릴 때 아버지가 학교에 가야 한다며 저녁 8시 30분에 깨우고는 했던 그 놀림을, 아들 '동주'에게 되풀이한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표정으로 그렇게 놀리던 아빠 모습이 문득 생각난다며 말이다. 물론 서사적으로도 연결된다. '옥주'와 '병기'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일은, '병기'(그리고 고모 '미정'(박현영))와 할아버지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일과 다른 층위에 있는 듯 보이면서도 결국 '옥주'가 어떤 태도를 지닌 인물인지에 관해 생각하게 하는 장치로 다가온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곡 '미련'은 '옥주'가 자전거를 탈 때, 그리고 엔딩에서 각각 다른 버전으로 되풀이되는데 중요한 감정적 순간에만 최소한의 음악 사용을 허락하며 그것마저 차 안 혹은 집 안의 오디오를 통해 자연스러운 방식으로만 쓰인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우리 가족들은 흠결이 있다.
학생 때까지만 해도 그런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말을 삼가고 좋은 이야기들만 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모든 가족들에게 그런 흠결들과 상처들이 있고,
각각의 방식으로 그것을 치유해 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윤단비 감독)



꿈 같은 건 안 꾼다던 옥주는 그 여러 감정들이 홀연히 응축된 긴 꿈을 갑자기 꾼다. 아니, 꿈이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기 뜻대로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는 것과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는 것과 유년의 아주 사소한 일이 성년이 되고서도 불현듯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 홀로 음악과 술 같은 것을 두고 고개를 가로젓는 어떤 모습을, 아무 조건도 조언도 없이 가만히 양손을 다해 다독여주는 어떤 손길을 목격한 후. 짧지만 가장 길었을 그 밤을 보낸다. 밥을 삼키다 "오늘따라 찌개가 좀 싱겁네" 같은 말이 이유 없이 짠 눈물을 촉발하기도 하고, 남매의 작은 다툼이 "우리가 언제 싸운 적이 있었나" 같은 말과 "라면 끓여줄게" 같은 말이 되기도 한다. 알지 못하는 사이 내게도 이런 여름이 있었다. 몰랐던 계절을 가만히 발견한 기분으로 극장을 나선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2차 포스터

<남매의 여름밤>(2019), 윤단비 감독

2020년 8월 20일 개봉, 104분, 전체 관람가.


출연: 최정운, 박승준, 양흥주, 박현영, 김상동 등


제작: 오누필름

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 9/10점.)

*영화 <남매의 여름밤> 예고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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