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더 우먼 1984'(2020) 리뷰
*<원더 우먼>(2017)의 일부 중요 내용이 언급됩니다.
[제시카 존스] 시즌 1(2015)의 메인 빌런인 '킬그레이브'(데이비드 테넌트)는 대단한 물리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신체 조건이 특출 나지도 않지만 강력한 정신적 능력으로 다른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일종의 미립자 같은 바이러스가 '킬그레이브'가 원하는 어떤 행동을 그 사람이 하도록 만드는 건데, '킬그레이브'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하거나 자살을 시키는 등 막강하고도 창의적인 방식으로 자기 능력을 활용하는 빌런으로 [제시카 존스] 시즌 전체를 관통한다.
같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내에 <엑스맨> 시리즈의 '프로페서 X'(패트릭 스튜어트/제임스 맥어보이) 역시 빌런은 아니지만 강력한 텔레파시 능력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캐릭터다. 이처럼 수퍼히어로 장르의 미디어 믹스에서 묘사되는 '능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내 기준에서 빌런의 그것 중 특히 무섭고도 진정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여겨지는 게 앞선 예시들과 같이 다른 사람, 특히 선량한 사람이 빌런의 의지나 욕구에 따라 특정한 행동을 행하도록 하는 일이다. 물론 '킬그레이브'의 그것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라기보다 정신이 거스를 수 없을 만큼 육체에 강력한 영향을 주는 쪽에 가깝지만, 빌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힘보다 이쪽이 더 파괴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원더 우먼 1984>(2020)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조지 오웰 소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물질적 소비 장려가 절정에 다다랐던 시기를 배경으로 다른 사람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인물이 빌런으로 등장한다. '맥스웰 로드'(페드로 파스칼)는 자신의 사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전설처럼 내려오던 고대 유물에 탐닉하고 있었고, 그것의 힘은 '맥스' 자신은 물론 모두가 한 번쯤 가져봤거나 가지고 있을 만한 근원적인 욕망을 건드림으로써 세계적 재앙을 예고한다.
원하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맥스' 혹은 그가 가진 '드림스톤'의 위력은 무엇보다 <원더 우먼 1984>의 주인공인 '다이애나'(갤 가돗)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준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문화인류학과 고고학 전문가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박물관 동료이자 보석과 광물 전문가인 '바바라'(크리스틴 위그)와의 대화 중 라틴어로 된 주문이 쓰인 황색 수정 광석을 접한다. 소원이 너무 많아서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던 '바바라'와 달리 '다이애나'에게는 너무도 명확해서 스스로 가장 잘 아는 소원이 있었다.
<원더 우먼>(2017)의 속편에 크리스 파인이 연기한 '스티브 트레버'가 다시 출연한다고 했을 때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건 그가 어떻게 다시 출연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쌍둥이나 아들 찬스 같은 걸 쓴다든지 회상 장면으로만 등장한다든지 해서 스타 배우를 시리즈 속편에 다시 출연시키는 일이야 흔하지만, 문제는 "난 오늘을 구할 테니, 당신은 세상을 구해요"라고 말하며 전작에서 포화 속으로 비행기를 몰았던 '스티브'가 <원더 우먼 1984>에서 재등장할 이유와 그 방법 자체가 모호해 보였던 것.
그 관건은 본작의 주 소재인 '드림스톤'에 있었다. 고대 신들의 힘이 담긴 이 물체는 그것에 대고 소원을 비는 이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만, 소원에는 대가가 있다. (그 대가가 뭔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는 건 여기서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아무튼, '다이애나'가 무의식 중에 혹은 분명한 의식 중에 속으로 생각했던 게 '스티브'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을 테고 거짓말처럼 '스티브'는 나타난다.
<원더 우먼 1984>의 이 대목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적 있는 이들에게 충분히 닿는 공감대가 있다. 전작에서 수십 년이 지나도록 '다이애나'는 '스티브'를 잊지 못하고 있었고 그것은 '다이애나'의 집 곳곳에 있는 그의 흔적들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만큼 '다이애나'에게 사랑은 중요한 테마였는데, 본작에서 '드림스톤'에 의해 벌어지는 여러 사태들은 '다이애나'에게 그 사랑을 다시 포기해야 할 만큼 막대한 것으로 다가온다.
"My life hasn’t been what you probably think it has.
We all have our struggles."
-Diana Prince
이 대목에서 중요해 보이는 건 <원더 우먼 1984>의 오프닝이다. 이미 전편에서 '다이애나'가 자란 데미스키라에 관해 충분히 묘사되었는데 속편에서 재등장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마존의 가장 명예로운 전사가 되기 위한 시합에서 어린 '다이애나'(릴리 아스펠)는 지름길을 택해 먼저 결승선에 도착하지만 그를 훈련시켜준 장군인 '안티오페'(로빈 라이트)는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안티오페'는 진짜 영웅은 거짓으로부터 탄생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 '히폴리타'(코니 닐슨) 역시 말했다. 진정한 전사로 거듭나려면 진실을 마주할 용기와 성실함이 있어야 한다고. 데미스키라가 전사를 길러내는 방식에는 육체적 강인함만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필요한 진실한 태도가 깃들어 있었다.
'드림스톤'이 소원을 이뤄주는 대신 대가를 요구한다는 사실은 그래서 중요하다. 누군가 한 사람이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것을 해하거나, 스스로의 진실성과 맞서야 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 그것은 자신의 진실함을 배신하게 되기도 한다. '다이애나'는 데미스키라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진실하게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세상과 모든 것을 맞바꿀 수도 있을 만큼 간절하게 생각해왔던 것이 눈앞에서 믿을 수 없게도 이루어졌는데, 다시 한번 그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선택해야만 한다. 소원을 포기(Renounce) 해야 한다고.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여 상처와 흉터를 남기는 시대에, 재난과 재앙이 불확실성으로 늘 내재한 시대에, '다이애나'는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자고 그것을 진실함과 맞바꾸지는 않겠다고 어렵게 다짐한다. 모두가 소중한 것을 잃었고 모두가 저마다의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는 것을 헤아리면서, 그럼에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스스로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여전히 구해낼 수 있다고. '다이애나'는 자신이 가진 아마존 전사로서의 신체적 강인함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본 사람의 가장 진실하고 선한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한다.
마음을 바꿔먹는 일. 혹은 아직 곁에 남아 있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일. 이런 이야기를 오늘날 대중적 흐름과도 같이 자리한 수퍼히어로 장르에서 하기란 너무도 뻔하고 또 너무나 선한 이야기여서 어떤 이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원더 우먼 1984>의 상영시간은 전작보다 10분 정도 길어졌다. 이것은 전적으로 액션의 파급력과 시각적 스케일이 주는 압도감보다는 '필요하다고 믿는' 이야기를 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이 시대에 여전히 진실함을 믿는 일이, <원더 우먼 1984>에서는 능히 어떤 일을 해낸다. 극장 바깥에서도 그럴까. 실상 <원더 우먼 1984>의 이야기는 전염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원더 우먼 1984>는 수퍼히어로 시네마에 여전히 우리가 쉽게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떨림과 울림이 있다는 걸 증명해낸다.
<원더 우먼 1984>(Wonder Woman 1984, 2020), 패티 젠킨스 감독
2020년 12월 23일 (국내) 개봉, 151분, 12세 이상 관람가.
출연: 갤 가돗, 크리스 파인, 릴리 아스펠, 크리스틴 위그, 페드로 파스칼, 코니 닐슨, 로빈 라이트 등.
수입/배급: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원더 우먼'을 아는 모두에게 소중하게 다가올 특별한 카메오 출연이 있다.
*(★ 8/10점.)
*영화 <원더 우먼 1984> 예고편: (링크)
*관객의 취향 '써서 보는 영화' 영화 글쓰기 온라인 수업 1월반: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