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
2016년 3월의 가장 뜨거운 영화였던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그 열기만큼이나 낙폭이 다소 크다. 3년 전 <맨 오브 스틸>을 통해 DCEU(DC Extended Universe)의 문을 열어젖힌 잭 스나이더는 워너와 DC의 <저스티스 리그> 프로젝트의 굵직한 작품들의 연출을 맡게 되었고, 데이빗 고이어, 크리스 테리오, 크리스토퍼 놀란 등 막강한 각본가와 제작진이 투입되었다. 처음 가제인 <맨 오브 스틸 2>로 출발했던 이 프로젝트는 <Batman v Superman>을 거쳐 <Batman v Superman: Dawn of Justice>로 제목을 확정했다. 당연하게도 <맨 오브 스틸>로 시작된 세계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격적으로 DC코믹스 히어로들의 집합체인 <저스티스 리그>로 향하는 본격적인 관문의 성격을 자연히 내포한 작품이지만, 수퍼히어로의 역사를 이루는 양대산맥인 '배트맨'과 '수퍼맨'(2006년 국내 개봉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Superman Returns>는 <수퍼맨 리턴즈>로 명명되었다. 개인 취향이지만 실제 발음과 표기에 가까운 '수퍼맨'이란 단어에 '수퍼맨'보다 더 애정이 간다.)이라는 두 캐릭터가 한 영화에서 격돌한다는 것만으로도 최대의 기대작으로 등극했다. <맨 오브 스틸>을 꽤나 훌륭한 리부트로 만족스레 감상했던 나 역시도 2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온 영화임은 물론이다.
결론적으로,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은 태생적으로 하나의 독립적인 영화로서는 존립하기 어려웠을 뿐더러 그 결과물 역시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명작'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 편의 개별 작품으로 존립하기 어렵기에 그 판단이나 평가 역시 조금은 유보적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의미 없이 편 가르고 대결 짓는 것을 좋아하기에('누구랑 누구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식의 것들) DC와 마블, 마블과 DC를 항상 비교하지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작품들처럼 수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사이보그, 플래쉬, 샤잠 등의 캐릭터를 독립 영화로 먼저 다루었다면 <저스티스 리그>는 뚜렷한 색채 없는 밍숭맹숭한 작품이 되었을지 모른다. 경쟁 상대를 고려해도 별 다르지 않은 비슷한 노선을 걷는 것으로 폄하될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원더우먼의 등장이 그토록 전율을 가져올 수 있었던 건 <원더우먼>(2017)이라는 영화가 이 영화보다 먼저 개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싱어 같은 감독에 비해 잭 스나이더는 탄탄한 원작을 토대로 자신의 철학을 녹여내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그저 한 명의 '코믹스 팬'으로서 매 장면의 디테일을 스크린에 헌사처럼 재현하는 쪽에 가깝다. <왓치맨>이 그랬고 <맨 오브 스틸>도 그동안의 '수퍼맨' 영화들과 많이 달랐다. 많은 경우 촘촘한 연결보다는 순간의 집중도와 화력에 신경쓰는 것처럼 보이기에 그의 연출 스타일은 다수를 만족시키기 어렵다. 코믹스 원작에 친숙한 이들이라면 설정이나 내용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은 이가 보면 불쑥 튀어나오는 등장 인물들에 충분하지 않은 배경 설명까지,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 자연하다.
다만 <맨 오브 스틸>이 꾀한 변화가 시리즈의 새로운 출발로서 나쁘지 않은, 우직하고 뚝심 있는 결과물을 보여줬던 것과 달리 <배트맨 대 슈퍼맨>은 필연적이든 혹은 의도적이든 간에 산재해 있는 시퀄들을 염두에 둔 채 부담감을 안고 출발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이른바 '떡밥'은 여럿 제시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기보다는 스스로 밀어붙인 작품이다. 예를 들면 배트맨과 수퍼맨의 어머니의 이름이 실제로 같다는 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결정적인 순간 두 영웅이 싸움을 멈추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장면이다. (단지 영화 속 갈등이 탄탄하고 뿌리 깊은 갈등이 아니라 그저 오해의 산물 정도로만 비춰지기 쉽기에 그 장면 자체의 아쉬움은 물론 있다.)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고 무수한 무고한 이들을 사지로 몰아갈 거라 믿었던 'False God'이 실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절실할 줄 아는 한 인격체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사전에 '마사 웨인'과 '마사 켄트'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되겠으며, 한 해에도 몇 편씩 쏟아져 나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면서 인물이 처한 배경이나 내면 - 적어도 그 영화에서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은 것 - 에 대해서 따져보고 생각하면서 볼 관객이 요즘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번역가 특유의 쉽고 편한, 말하자면 디테일을 대체로 생략해버리는 자막도 이 대목을 그저 '마사 드립'으로 치부해버리는 데에 단단히 한 몫을 했다. 첫 관람시에는 몇몇 단어를 빼면 그다지 큰 무리는 없는 번역이라고 느꼈던 것과 달리 다시 보니 폴 페이그의 <스파이>(2015)의 국내 자막만큼이나 본 뜻을 왜곡하고 생략해버리는 책임 있지 못한 번역으로 다가왔다. (아직 극장 상영 중이지만 어서 DVD가 발매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래서이다.)
영화의 상영 시간이 더 길었거나 편집에 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 위용 자체만으로 전율을 가져오는 몇몇 장면들과, 역대 가장 영향력 있는 두 히어로가 서로를 응시하는 장면만으로도 이 작품을 '극장'에서 봐야 할 이유는 더없이 충분했고, 게다가 '벤 애플렉표 배트맨'의 데뷔는 인상적이었다. 오히려 '배트맨'과 수퍼맨'에 대해 아쉬울 것은 없었고 '렉스 루터'(제시 아이젠버그)가 연기에 비해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빛을 발하지 못한 것이 조금은 미덥지 못하다.
한편으로 제목을 <맨 오브 스틸 2>로 지었다면 어땠을까. 당연하게도 <배트맨 대 슈퍼맨>이라는 제목을 보고 영화화되지도 않은 '저스티스 리그'에 대해 제대로 알 리가 만무한 다수의 관객들은 '배트맨과 수퍼맨의 역대급 대결(=싸움)' 정도만을 기대하고 극장에 갔을 것이기 때문이며, 원제에서 'vs' 대신 'v'를 사용한들 '아는 사람만 아는' 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잭 스나이더가 <저스티스 리그>까지 무사히 잘 마무리할 것이라는 데에는 그다지 의심을 품지 않는다. 다만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는 것. 이미 DC는 두 걸음을 떼었고, 출발한 이상 멈추지 말고 독자적인 노선을 이어가길 바라본다. 중간에 연출자를 바꾸거나, 이미 진행 중인 영화의 재촬영을 하거나, 각본을 수정하거나 하는 일은 하나의 거대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데 있어서 오히려 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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