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미스 아메리카나'(2020)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의 시나리오를 쓸 때 ‘내 딸이 열 살 정도 되었을 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라고 생각하며 집필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딸은 세 살이었다고. 이렇게 말해볼까. 훗날 딸을 자녀로 맞이하게 된다면, 그가 나고 자라 열 살 정도 되었을 때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아메리카나>(2020)는 세계적 팝 스타 중의 한 명인 테일러 스위프트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지금껏 보지 못한 테일러 스위프트의 또 다른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작곡가 겸 가수로서 무대를 빛내는 모습은 물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여성으로서의 그녀를 만난다.’ 넷플릭스는 <미스 아메리카나>의 소개를 이렇게 적고 있다. 넷플릭스에는 추천하고 싶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주 많은데, 마찬가지로 테일러 스위프트를 주인공으로 하되 그의 ‘Reputation’ 스타디움 투어 실황을 다루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레퓨테이션 스타디움 투어>(2018)라든가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2017), <니나 시몬: 영혼의 노래>(2015)처럼 아티스트, 특히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여럿 있다.
꽤 오래 전부터 ‘연예인’이 유명세와 부를 얻는 직업일 수는 있어도 불특정 다수의 대중들과 사회에 공개적으로 노출된 채 일종의 약자 입장에 늘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왔다. 허지웅의 에세이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는 다음과 이야기가 나온다. 이어질 인용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서 영화 내용과 함께 재차 언급하려고 한다.
“가십기사의 존재는 연예계 스타를 향한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과 다르다. 가십기사는 역설적으로, 대중이 스타라는 호칭으로 소환되는 인간 개개인에게 사실 별 애정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마약 복용이나 자살 이야기는 훨씬 더 잘 팔린다. 그래서 가끔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 고인이 되었다는 보도가 튀어나온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파렴치한으로 몰아 기자회견을 열고 무릎을 꿇게 만들기도 한다.”
(문학동네, 2014, 203쪽)
앞서 소개한 줄거리처럼, 그리고 <미스 아메리카나>라는 제목이 뜻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사람들이 원하는 ‘미스 아메리카나’의 이미지에 부합하려 애써왔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노래를 해왔던 테일러 스위프트가 조금씩 자신이 내고 싶은 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담는다. 주 배경은 그의 일곱 번째 스튜디오(정규) 앨범인 ‘Lover’(2019)를 준비 및 제작하는 동안의 일들이기도 하다.
테일러가 한 음악 시상식에서 최우수 뮤직비디오 상을 받았던 2009년. 흑인 남성 가수인 카니예 웨스트가 테일러의 수상 소감 도중 무대에 난입한다. 빼앗다시피 마이크를 집어 든 카니예는 “이 상은 비욘세가 받았어야 한다”라는 말을 한다. 얼어붙은 테일러는 애써 웃어 넘기려 하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불과 20대 초반이었을 때. 이후 둘은 화해한 듯한 제스처를 보이지만 카니예 웨스트는 자신의 노래에 ‘나는 테일러 스위프트와 잘 수 있었어’ 같은 가사를 넣고 공연에서 해당 부분을 관객들이 따라 부르게 하는 등,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진심 어린 사과를 하기보다 오히려 테일러를 조롱하는 듯한 행보를 이어갔다.
어쩌면 가장 미국적이라 할 수 있는 컨트리 음악으로 시작해 테일러는 팝으로의 장르적 변모를 꾀하고 결국 그것에 성공했지만 앞서 간략히 언급한, 그러나 차마 여기에 다 언급하고 싶지는 않은 카니예와의 더 끔직한 일들로 인해 트위터를 비롯한 온라인 공간에서 ‘꽃뱀’ 같은 취급을 당한 적이 있다.
그 후 잠시 은둔하는 듯 보였던 테일러 스위프트의 반격. 앞서 언급한 ‘Reputation’은 테일러의 ‘Lover’ 이전, 즉 여섯 번째 정규 앨범(2017)이다. 앨범 발매 전 테일러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아예 뱀이 나오는 영상을 올렸고, 정규 앨범 발매에 앞서 공개한 싱글 트랙의 제목은 ‘Look What You Made Me’였다. 테일러는 더 이상 사람들이 원하는 이미지, 사람들이 바라는 이미지, 특히 대상화된 여성상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향한 멸시와 조롱을 정면돌파 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발언도 하기 시작한다. 2018년 테네시 주 공화당 여성 상원의원 후보인 마샤 블랙번을 남녀동등임금법과 여성폭력방지법 등의 입법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지지할 수 없다고 표명한 것인데, 이 일은 컨트리 싱어로서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않겠다고 한 걸 처음으로 뒤집은 것이다.
앞서 인용했던 허지웅의 문장을 다시 떠올리면서, 테일러 스위프트와 카니예 웨스트 사이의 일에 대해 좀 더 설명해볼까. <미스 아메리카나>라는 영화에 대한 리뷰라기보다 이 글은 테일러 스위프트라는 여성 아티스트에 대한 글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지만,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갖는 약간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겠다.
2016년 초, 카니예 웨스트가 자신의 신곡 ‘Famous’를 발표했을 때의 일이다. 섹스 언급을 하는 문제의 그 가사는 카니예가 2009년 MTV VMA 시상식에서 본인이 테일러의 수상 소감 중 난입했던 덕분에 테일러가 유명해질 수 있었다고 말하는 무례한 내용이다. 가사의 내용과 선정성이 문제가 되자 카니예는 ‘테일러와 사전에 합의한 내용’이라고 말한다. 카니예의 아내인 킴 카다시안이 카니예와 테일러가 전화통화(스피커폰)로 노래 가사 이야기를 하는 내용을 찍은 영상을 공개하면서 여론은 카니예 쪽으로 기운다. 표면적으로, 카니예가 노래 가사에 테일러 언급을 하는 것에 대해 테일러에게 허락을 구하는 내용이었고 테일러가 이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트위터의 인기 트렌드 1위에 ‘#taylorswiftisoverparty’(테일러 스위프트가 과대평가 되었다는 뜻)가 오르고 쥐와 뱀 이모지가 트위터를 뒤덮는 등 사람들은 테일러 스위프트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며 비난했다. 이후 테일러는 거의 1년 가까이 공백기간을 거친 뒤 2018년 ‘Reputation’ 앨범으로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섣부른 조롱과 비난에 정면으로 맞서며 화려하게 컴백했지만, 데뷔 이후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정도의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게다가 한 라디오 DJ가 공개 석상에서 테일러를 성추행 하는 등 여러 악재들도 겹쳤다. (다행히, 해당 현장에는 일곱 명의 목격자가 있었고 테일러는 소송에서 이겼다.)
2020년 3월, 테일러 스위프트와 카니예 웨스트의 당시 통화 전체 내용이 공개되었는데 조목조목 살펴보면 테일러가 문제의 가사 내용 전체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닐 뿐 아니라 처음 킴 카다시안에 의해 공개된 통화 내용이 악의적으로 편집된 것이라는 것까지 밝혀졌다. (킴은 카니예가 노래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도 ‘bitch’ 같은 단어를 쓴다며 테일러를 비하하는 내용이 아니라며 반응했다.) 이 일이 억울함이나 부당함을 해소해준 것만으로 보이지는 않느다. 진작에 알려졌어야 할 일이 이제서야, 그것도 너무 늦게 알려진 것뿐이다.
<미스 아메리카나>는 현재 시점에서 테일러가 7집 앨범을 준비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그가 데뷔한 열세 살일 때부터 지금까지의 주요 궤적들을 따라간다. 우리는 성공한 아티스트의 화려함과 무대 앞에서의 모습만을 주로 생각하지만, 유명인의 삶은 언제나 고단하다는 걸 이 다큐멘터리는 잘 보여준다. 공연을 하기 위해 전용기에서 내려 차량으로 이동할 때도 테일러는 주변에 파파라치가 있지 않은지 걱정해야 하고,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그의 과거 연애사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고 그것을 통해서만 기쁨과 성취를 느끼게 되면 나쁜 일 하나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어요.”
노래하는 사람이자 노래를 만드는 사람, 대중의 조명을 받는 사람이자 가족과 친구와 일상을 보내는 사람, 직업인인 동시에 유명인으로서 자신의 발언과 행동 하나하나에 염려하고 조심하는 사람. <미스 아메리카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양하고 입체적인 시각에서, 동시에 카메라 속의 그를 객체화 하지 않으면서 균형감과 섬세함을 잃지 않는 모범적인 예로 다가온다. 불과 85분의 짧은 상영시간에 이렇게 풍부한 이야기를 표현하다니. 테일러 스위프트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겉으로 보이는 삶 이면의 이야기를 조명하는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미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상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공감을 이끌어내면서 일종의 통쾌감까지 주는 이야기였어기에.
“반짝이를 좋아하면서도 이중잣대를 반대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분홍색을 입으면서도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컨트리 음악을 하는 사람이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앞서 소개한 테일러의 테네시 주 상원의원 선거 관련 발언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에 “테일러의 음악이 25% 정도 덜 좋아졌네요”라고 발언을 했다고. 가장 미국적인 음악인 컨트리 장르에 대해 세부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지만, 특히 여성 아티스트가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을 금기시해온 일은 사회가 원하는 순종적 여성상에 대해 강요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큰 인기를 누리던 3인조 여성 컨트리 그룹 ‘딕시 칙스’도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해 사람들의 야유와 비난을 겪어야만 했다.
주변에서는 만류했지만 테일러는 2018년 마샤 블랙번에 맞선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피드를 1억 명이 넘게 팔로우 하는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올렸고, 선거의 판세를 뒤집진 못했지만 게시물 업로드 이후 24시간 동안 해당 선거구 젊은 층의 투표 등록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목소리를 내는 일은 결과가 아니라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겠지. 젊은 여성 아티스트의 삶에 대한 더 풍부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도 다시 생각났다.
사적으로 테일러 스위프트만큼 레이디 가가를 좋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을 언급하는 이유는 <미스 아메리카나>와 실제로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는 레이디 가가의 5집 앨범 ‘Joanne’(2016)을 준비하는 과정과 미국 최대의 이벤트인 슈퍼볼 하프타임 공연 준비 등을 중심으로 팝 스타로서 그의 무대 뒤에서의 일상을 생생히 담고 있다.
“늙은 팝 스타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오랜 팬들과 함께 말이에요.”
(레이디 가가)
레이디 가가는 데뷔 때부터 팝의 아이콘이자 대중문화를 움직이는 인플루언서가 된 것은 물론 그와 동시에 걸음하는 거의 모든 곳에서 의상과 발언 등 사소한 것 하나까지 원치 않는 화제 혹은 논란에 시달리기도 했다. 사생활의 영역인 남자 관계는 물론이고. 앞에서 이야기 한 테일러 스위프트가 겪은 일과 그 종류는 좀 다르지만, 레이디 가가 역시 3집 앨범인 ‘Artpop’(2013)이 앞선 두 앨범과 달리 혹평에 시달리면서 커리어 측면에서의 나름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미스 아메리카나>와 <레이디 가가: 155cm의 도발>은 아티스트의 삶의 모습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로서 소재 자체의 유사성뿐 아니라 서로 장점도 공유하고 있다. 예컨대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다룰 때 너무나도 뻔해지기 쉬운 것은 그 사람의 출생부터 말년 혹은 현재까지의 주요 궤적들을 단순히 나열만 하게 되는 일이다. 두 영화 모두 평범한 전기 형식의 구성을 거부한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 동료 등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가 특히 다큐멘터리에서는 많은 분량을 채우기 쉬운데 두 작품은 앨범 준비를 하며 작사를 하거나 프로듀서와 함께 작업을 하거나 집에서 반려견과 시간을 보내는 등 유명인에 대한 환상이 아닌 일상적인 모습을 담는 데 주력한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나 타인의 언급, 대화도 물론 등장하지만 중심이 되는 건 어디까지나 아티스트 본인의 목소리다.
“밤이 되면 내 곁엔 아무도 없어요. 이 사람들은 다들 날 떠나겠죠. 분명히 그럴 거예요.
그럼 나 혼자 남게 되겠죠.”
(레이디 가가)
대중과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무대의 불이 꺼진 뒤 홀로 된 일상에서 외로움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 언제까지나 계속 성공만 할 수는 없을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려야 하는 사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 두 영화는 비슷한 화법으로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그 명암 모두를 놓치지 않으며 다루고 있다. 데뷔 후 여러 부침과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커리어의 새로운 정점과 그 오늘에 서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 테일러 스위프트와 레이디 가가의 진솔하고 당찬 목소리를 담아낸다.
“가수로서 이런 성공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테일러 스위프트)
테일러 스위프트의 곡 ‘White Horse’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I should have known I’m not a princess. This ain’t a fairy tale. (…) Now it's too late for you and your white horse, to come around.” 이 곡은 무려 2008년에 나온 테일러의 1집 앨범 수록곡인데 그는 여성 연예인을 향해 세상 사람들이 가하는 잣대를 성인이 되어 본격적으로, 그것도 심각하게 마주하기도 전부터 이미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공주’가 되지는 않겠다고. 앞서 쓴 바와 같이, 목소리는 또 다른 목소리를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그건 영화, 음악, 드라마, 소설, 시, 게임 등. 문화 전반을 초월적으로 관통한다.
“영화를 보면 여성은 언제나 사랑과 연관이 있어요. 그건 반드시 바뀌어야 해요.”
(아녜스 바르다)
여성 캐릭터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 건 이야기의 역사에서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닐 것이다. 넷플릭스가 상술한 바와 같은 다큐멘터리들을 적극 라인업에 포함시키기 시작한 건 단순히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만 해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정치적 올바름에 관해 그냥 ‘인식’하기만 해서는 좋은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서두에서는 테일러 스위프트에 관해 중점으로 이야기할 것처럼 시작했지만 결국 여성 아티스트 이야기로,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의 이야기로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한 해외 매체에서는 ‘테일러 스위프트 자체가 곧 음악 산업’이라고 평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이 이야기는 단지 한 명의 팝 스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팝이 국내에서는 그 인기 면에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장르로 꼽히지는 않는 것 같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향유되고 ‘이야기’될수록, 소중한 이야기는 더 많이 만들어진다.
https://www.netflix.com/title/81028336
https://www.netflix.com/title/80196586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