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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Feb 21. 2021

각자의 진실한 거짓들이 서로 공존하는 방법

영화 '페어웰'(2019) 리뷰


하나의 상황을 떠올려본다. 가족 중 한 명이 어느 날 평소처럼 병원을 찾았다가, 폐암 4기라는 진단과 앞으로 살 날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접한다. 정확히는 그 소식을 먼저 듣는 것이 해당 질병에 걸린 당사자가 아니라 가족이고, 가족들은 당사자에게 그것을 알리지 않고 싶어 한다. 왜? 그 사람이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서. 그렇다면 그렇지 않아도 3개월밖에 남지 않은 그의 삶의 시간이 더 짧아져버릴 수도 있을 노릇이고, 당사자는 물론 그를 지켜보는 주변의 슬픔도 커질지 모른다.


그러나 아예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당장 가족들은 그것을 당사자에게 숨기는 한편,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전달해야 그 사람에게 가능한 적은 상처를 줄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어떻게 말할까? 아니, 말하는 것이 맞을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맞을까. 어느 한쪽이 옳다는 사실이 있을까 아니면 각자의 입장에서 생겨나는 진실만이 있을까. 지금 다룰 영화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영화 '페어웰' 스틸컷


"Based on an Actual Lie."


중국계 미국인 감독 룰루 왕의 영화 <페어웰>(The Farewell, 2019)은 바로 위와 같은 상황을 두고 가족 구성원 간의 서로 다른 입장과 생각들로 빚어지는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 '실화를 바탕으로 함' 같은 문구는 많이들 보았겠지만, 위와 같은 언급은 다소 낯설면서도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키웠다. 실제 거짓말에 기초함. 거짓말은 거짓말인데 진짜인 거짓말. 그렇다면 이건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걸까 아니라는 걸까? 같은 생각들을 하게 될 것이다. <페어웰>은 룰루 왕 감독의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병원을 찾은 할머니 '나이 나이'(자오 슈젠)는 폐암 진단을 받고, 가족들은 그것을 말하지 않기로 한다. 미국에 사는 손녀 '빌리'(아콰피나) 가족을 비롯해 각지에서 떨어져 살던 가족들은 '리'의 오빠 '하오 하오'(한첸)의 결혼식을 핑계 삼아 '나이 나이'의 집에 모인다.


영화 '페어웰'의 룰루 왕 감독과 '빌리' 역의 아콰피나
"우리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는지, 서로 분명히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도 어떻게 여러 진실을 가질 수 있는지 탐구해보고 싶었다."


룰루 왕 감독의 인터뷰 중 언급된 위와 같은 내용을 가지고도 짐작할 수 있듯, <페어웰>은 얼핏 영화 제목에서 할머니의 마지막을 앞둔 가족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작별'을 행하는 이야기일 것 같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것만이 영화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글 서두에서 언급한 상황에서 가족들이 당사자에게 사실대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중국식의 문화다. 반면 어릴 때 중국을 떠나 미국에서 자란 '빌리'네 가족은 미국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이와 같은 가족들의 결정에 반한다. 특히 '빌리'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데, 할머니가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생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므로, 당사자인 할머니 본인이 알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화 '페어웰' 스틸컷

그러니까 <페어웰>에서 중요한 건 '할머니에게 폐암 이야기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두고 각자의 입장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데에 있다. 중국인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중국에서만 살아온 이가 있고 일본으로 건너간 이가 있으며 '빌리'와 그의 부모처럼 미국으로 건너간 이들도 있다.


다시 한번 생각한다. '실제 거짓말을 기초로 함.' 사실 '빌리'의 오빠 '하오 하오'의 결혼식은 가족들이 한데 모여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들어낸 핑계에 해당된다. 가족들은 이미 할머니 '나이 나이'의 집에 모여 있고 '빌리'는 조금 늦게 도착한다. 가족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빌리'를 본다. 그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할머니에게 '진실'을 말해버릴까 봐. 할머니가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모임의 단란한 목적은 깨어지고 모두가 어떤 슬픔에 잠길지도 모른다. 과연 이것은 선의의 거짓말인가?


영화 '페어웰' 스틸컷

<페어웰>에는 할머니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시선이 프레임 중앙, 그러니까 곧 관객을 향하는 신이 몇 개 있다. 아마도 의도적인 촬영 방식으로 여겨지는데 그건 관객에게도 해당 질문을 한 번 더 묻기 위한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 중반에는 할머니를 데리고 '빌리'와 가족들이 병원에 한 번 더 걸음 하는 신이 있다. 의사 역시 할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할머니에게 지난번 걸렸던 폐렴이 아직 완치되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을 하며 할머니를 안심시킨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할머니 곁에서, 뉴욕에 사는 '빌리'와 우연히 영국 유학을 해서 영어를 잘하는 의사는 서로 영어로 할머니의 병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영화 '페어웰' 스틸컷

이것은 할머니를 속이는 것인가. (작중 미국에서는 이것이 불법이라는 것이 언급되기도 한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은 과연 있나. <페어웰>은 이와 같은 상황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몇 가지 추가적인 사실들이 더 밝혀지거나 언급된다. 예를 들어 가족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할머니 '나이 나이' 역시, 과거 남편의 질병에 대해 지금 가족들이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했던 적이 있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빌리' 역시, 자신의 커리어와 관련된 어떤 일 하나를 가족에게 '걱정시킬까 봐' 일부러 말하지 않는다.


영화 초반에는 '빌리'가 중국으로 돌아오기 전, 가족들과 나누는 식사 중 대화 장면이 짧게 지나간다. 반려 고양이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처음에는 직설적으로 말했다가 '그런 충격적인 일은 너무 충격적이지 않게 천천히 혹은 돌려서 말해야 한다'라는 피드백을 받고 다음에는 또 다른 소식에 대해 "장모님이... 지붕에... 올라가셨다"라고 다르게 표현하는 이야기. '빌리'의 아빠 '하이얀'(티지 마)이 꺼내는 이 농담은 아마도 여러 차례 되풀이되었을 것이고 함께 앉아 있는 가족들은 그것을 이미 익숙한 듯이 듣고 있다.


이것은 가족이 함께 보내는 일상이 어떤 것인지를 간접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역설하는 하나의 일화가 아닐까. 듣고 또 들었던 농담을 여전히 웃으며 들어주는 일, ('빌리'의 엄마는 그것을 이미 여러 번 들은 것이어서 웃는다) 때로는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속아주는 일. 그것을 굳이 들추려 하지 않거나, 상대가 꺼낼 때까지 기다려주거나.


영화 <페어웰>에는 할머니의 폐암 발병 소식을 숨기는 일 외에 몇 가지의 '선의로 인한 거짓말'들이 더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직접 언급되거나 밝혀지지는 않지만, 또 다른 거짓들도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가령, '할머니는 정말 자신이 아픈 것을 모를까?'라든가, '하오 하오'의 결혼 상대인 '아이코'(아오이 미즈하라)는 '하오 하오'와 실제로 교제하는 사이일까 아닐까?' 같은 생각들. <페어웰>은 물론 정답을 남기지 않는다. 할머니는 다만 '빌리'에게 인생 조언 하나를 남긴다."인생이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라고.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와 누군가와 작별을 계속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살아진다는 명백한 사실보다,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진실'은 그것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 하는 일이겠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삽입된 노래 'Senza Di Te'는 Air Supply의 곡 'Without You'가 원곡이다. 'Without You'의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No I can't forget this evening, or your face as you were leaving. But I guess that's just the way the story goes..."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저녁과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 그런 것들은 살면서 결코 잊히지 않는 종류의 기억일 테지만, 삶의 이야기는 다만 그렇게 흘러갈 따름이다.


영화 '페어웰' 스틸컷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매일 실감하며 요즘을 지낸다. 명상 센터에서나 할 법한 말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매일 아침 양치질하며 명심해야 할 생활의 당부라는 걸 깨달았다. 모호하고 뜬구름 잡는 비유가 아니라 1 더하기 1은 2가 되는 것처럼 군더더기 없이 명백한 연산 같은 말이라는 것도, 위 아 더 월드 식의 낭만이 아닌 살벌한 경고의 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요조,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에서(마음산책, 2020))

영화 '페어웰' 국내 메인 포스터

<페어웰>(The Farewell, 2019), 룰루 왕 감독

2021년 2월 4일 (국내) 개봉, 100분, 전체 관람가.


출연: 아콰피나, 자오 슈젠, 티지 마, 다이애나 린, 홍 루, 장용보, 한첸, 아오이 미즈하라 등.


수입/배급: 오드


영화 '페어웰' 스틸컷

*(★ 8/10점.)

*<페어웰> 국내 예고편: (링크)



인스타그램: @cosmos__j

그 외 모임/클래스 공지 모음(노션):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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