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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Feb 25. 2021

내밀하고 진솔한 경험이 우리 삶의 놀라운 찬가가 되다

영화 '미나리'(2021) 리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이다. 그의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문학동네, 2015)에는 창작과 스토리텔링에 대한 그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는 일화가 등장한다. 그는 다큐멘터리 방송사 신입 PD이던 때, 한 선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시청자라는 모호한 대상을 지향해 방송을 만들면 결국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는다. 어머니라도 애인이라도 좋으니 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만들어라."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말을 "작품을 표현이 아닌 대화로 여기라는 말"이라고 해석하며 자신의 작품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을 예로 들어 그것을 '내 딸이 열 살 정도 되었을 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구상 및 집필했다고 언급한다.


어떤 것에 대해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말할 때 그 보편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전 세계인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어렵고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들 각자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고 무엇으로부터 마음이 동하는지 전부 다 헤아릴 수 있는 창작자는 없을 테니. 그렇다면 방법은? '자기 이야기'를 하면 된다. 보편성은 그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대화가 만들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를 통해서도 할 수 있고 봉준호 감독 영화를 통해서도 할 수 있으며 혹은 <스타 이즈 본>(2018) 같은 영화를 좋은 사례로 들 수도 있지만,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전적으로 3월 3일 개봉할 영화 <미나리>(2021)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여전히 시작되는 중이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가족, 부푼 꿈을 안고


한국에서 두 자녀와 가정을 꾸리던 부부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는 새로운 희망과 꿈을 안고 미국 아칸소 주에 온다. '에덴의 가든'을 꿈꾸며 제이콥은 미국에 정착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에 착안해 여러 채소를 길러내기 위한 농장을 시작한다. 가족의 행복을 꿈꾸며 모니카는 양계장에서 병아리의 암수를 구분하는 일을 하게 된다. 새 집에서 간단히 짐을 푼 가족의 첫 번째 밤. "우리 첫날이니까 다 같이 바닥에서 자자"라며 희망에 부푼 제이콥과 달리 가족들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제 몸 뉘일 수 있지만 '집'이라고 불러도 될까 고민해보게 되는, 작은 이동식 컨테이너 가옥. 그것도, 이웃과 떨어진 외딴 들판 위에 덩그러니 놓인.


영화 '미나리' 스틸컷

일하는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


제이콥은 농장이 잘 될 거라고 확신에 차 있지만 당장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빚을 내서 농장에 필요한 자원들을 끌어오고 모니카 역시 적지 않은 시간을 일한다. 아이들에게는 자연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미국에 온 '앤'(노엘 케이트 조)과 미국에서 태어난 '데이빗'(앨런 김) 남매. 한동안 '모니카'의 어머니이자 아이들의 할머니인 '순자'(윤여정)가 아이들과 함께 머물기로 하고, 가족의 집에 얼마 뒤 순자가 찾아오면서 <미나리>의 이야기는 달라진 국면을 맞이한다.


고춧가루와 한약 등을 한가득 챙겨 온 순자는 "To all our grandmas"라는 영화 엔딩 크레디트 말미의 문구처럼 많은 이들의 저마다의 할머니를 떠올리게 할 법한 캐릭터다. 그러면서도 순자는 자기는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며, 오히려 화투 같은 것을 데이빗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순자는 가족들이 잘 정착해나가길 진심으로 응원하고, 아이들에게 조금씩 다가가며 이들이 계속해서 가족일 수 있도록 든든한 뿌리를 지탱한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한때 '데이빗'이었을,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연대기


이것을 대충 '한국 가족이 아메리칸드림을 안고 미국 사회에 정착하는 이야기' 정도로 요약해버리면 단순할뿐더러 뻔해져 버린다. 그런 이야기들은 주로 외부로부터의 갈등이나 그로 인한 사건이 작용하고 가족의 여정에 훼방을 놓거나 시련을 안겨준다. 그러나 '사건'이라 칭할 수 있을 <미나리> 속 거의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이 가족의 삶의 반경 안에서, 주변인보다 가족 구성원 간에서 나온다. 제이콥의 농장 일을 돕는 '폴'(윌 패튼)이나 목사 등 몇몇 이웃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단역 정도에 머문다.


우선, <미나리>를 데이빗의 <우리집>, 아칸소의 <남매의 여름밤>이라 불러도 될까. 그것은 <미나리>가 정이삭 감독의 자전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비롯하며,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통해서 생생하고도 탄탄하게 완성된다. 요컨대, 이 영화가 사적인 이야기를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과정은 오직 그 작고 고유한 세계에 머물기를 택함으로써 일어난다. 이야기 핵심은 지역 사회가 아닌 가족 구성원 안에 있으며, 그것은 감독의 유년이었을 '데이빗'의 시점이면서도 그의 성장을 지켜보고 함께했을 가족 모두를 놓치지 않고 세세히 바라보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미나리>의 첫 장면은 (상술했던 컨테이너 집이 있는) 들판을 향해 들어오는 차 뒷좌석의 데이빗 시점 숏에 해당한다. 앞을 주시하는 제이콥과 주변을 살피는 모니카, 창밖 먼곳을 보는 앤을 번갈아 살피며 창 너머 풍경을 응시하는 데이빗. 이는 <미나리>가 가족의 이야기를 조망하되 유년의 시선을 떠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어린 정이삭 감독이 처음으로 마주하였을, 그리고 오늘날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을, 그때 그곳의 이야기를 <미나리>는 2020년대의 스크린으로 소환한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아이의 시점에서, 그러나 어른의 방식으로


영화에서 자연히 눈여겨보게 되었던 장면도 아이들 시점에서 가족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소화하게 되는 과정들이었다. 예를 들어 아칸소에서의 앞으로의 계획을 두고 말다툼을 하는 제이콥과 모니카를 조금 떨어져 지켜보던 앤과 데이빗은 종이비행기에 '싸우지 마세요'(Don't Fight!)라고 적어 엄마 아빠를 향해 날린다. 비슷한 장면이 한 번 더 등장하는데, 그때는 차 뒷좌석에 탄 남매가 바깥에 선 제이콥과 모니카를 바라보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긴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비중상 조연에 해당하는 순자의 캐릭터도 물론 그 자체로 생기와 활력을 지니고 있지만 전적으로 데이빗 (그리고 앤) 시점에서 바라보는 '할머니'의 역할로 그려진다. 미국에서만 자란 데이빗은 처음에는 '한국 냄새' 난다며 순자와의 대면에서 모니카 뒤로 숨고는 했지만 그와 시간을 함께하며 서서히 유대감을 형성한다. 그 과정은 영화에서 꽤 중요해 보이는데, 순자가 미나리 씨앗을 심는 것을 (순자를 제외하고) 처음 발견하는 것이 데이빗이라는 점과 더불어 순자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을 처음 목격하는 것도 데이빗이다. 게다가 순자는 데이빗이 지금껏 하지 않았던 어떤 행동을 처음 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나아가 그것을 지속해야 할 동기까지 부여한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우리는 어디서든 자라날 것이므로


영화 <미나리>는 꿈과 희망을 섣불리 낭만화하거나 지나치게 낙관하지 않으면서도, 사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저마다의 의미로 가 닿을 수 있을지를 아름답고도 따뜻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자립을 중요시하는 제이콥의 희망처럼 그의 농장은 번성할 수 있을까. 가족의 사소한 일상을 지키고 싶은 모니카의 바람처럼 이 한국 가족의 삶은 앞으로도 화목하고 단란한 모습일까. 순자가 가져온 미나리 씨앗은 잘 뿌리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처음 만나는 세계의 구석구석에 호기심을 갖고 움직이는 데이빗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


<미나리>가 주는 위로 앞에서 위와 같은 질문들을 두고 답을 찾는 것이 그리 유의미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중요하게 다가오는 점은 이 영화가 위로를 주는 방식 자체다. 지나온 세대의 강인함과 지난함에 경의를 표하고 지금 여기의 순간들을 반영하며 한편으로 누군가에게는 선물이 될 여정이 <미나리>에 있었다. <미나리>에는 각기 다른 인물로부터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이 총 세 번 각기 다른 상황과 맥락에서 언급되는데, 그건 마치 2021년을 살고 있는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전하는 메시지 같기도 하다. 모두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이야기가 이 세상에 있다면, 그건 처음부터 그런 욕심이나 포부를 갖고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자기만의 뜻과 방식으로 끝내 관철시킬 줄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디서든 자라는 미나리의 질긴 적응력과 생명력은 미나리를 '보편적인 채소'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다른 무엇과도 구별되는 바로 그 <미나리>로 만들 테니까.


영화 '미나리' 메인 포스터

<미나리>(Minari, 2021), 정이삭 감독

2021년 3월 3일 개봉, 115분, 12세 관람가.


출연: 스티븐 연, 한예리, 앨런 김, 노엘 케이트 조, 윤여정, 윌 패튼 등.


수입/배급: 판씨네마(주)


영화 '미나리' 1차 포스터 & 가족 포스터


*(★ 9/10점.)

*<미나리> 예고편: (링크)


본 글은 판씨네마(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아, 영화 관람 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인스타그램: @cosmos__j

그 외 모임/클래스 공지 모음(노션):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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