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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27. 2021

"네 삶 너머에도 너의 이야기는 존재하니까."

영화 '컨택트'가 체험시킨 비선형적 시간들


"네 삶 너머에도 너의 이야기는 존재하니까."
(There are days that define your story beyond your life.)

[영화 <컨택트>(Arrival, 2016), 드니 빌뇌브]



에이미 아담스가 연기한 언어학자 '루이스'가 먼 곳을 응시하는 저 표정에는 지나온 수십 년의 시간과 아직 다가오지 않은 더 기나긴 수백 년의 세월이 응축돼 있다. 얕은 산 아래로 내려오는 구름들과 저마다 짐을 꾸리고 분주히 어디론가 떠나가는 사람들. 조약돌 같기도 바위 같기도 한데 또 거울 같기도 한 헵타포드 종족의 비행선들이 지나간 자리. '루이스'는 옆에 선 물리학자 '이안'에게 묻는다. "당신의 전 생애를 다 볼 수 있다면, 삶을 바꿀 건가요?"


영화 '컨택트' 스틸컷


바꾸지 못한 것과 바꿀 수 없었던 것들이 연속이 지금까지의 삶이었다.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익숙했고 겉으로 표현하기보다 안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편안하다고 여겨왔던 시간들은 그렇게 나고 자랐기에 만들어졌다. 쓰는 일은 자주 다른 모습으로 그 형태와 양식을 바꿔가며 존재했는데, 단 하나 바뀌지 않는 게 있다면 표면화하기 위한 언어도 안으로부터 시작되기에 철저히 혼자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지금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잘 들여다보고 붙잡아두기 위해서. 정리되지 않는 복잡한 것들 사이에서 길 하나를 간신히 내어주고 싶어서. 그리고 이것이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 될 수는 없을까 하는 작은 기대 때문에. 또 다른 이야기. 그것은 쓰는 사람이 다 짐작할 수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쓰는 바로 이 글이 어떤 가치가 있을까. 상당수는 사적인 것으로 기록의 서재 구석 어딘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쓸 운명을 맞는다. 그건 그것대로 아주 무가치한 일은 아니겠지만 글에는 그리고 글쓰기에는 대부분 보상이 없다. "노동으로 비루한 문장들을 빚어내는"* 글쓰기란 정량화된 대가 없이 출구도 알 수 없는 (출구의 존재 여부도 모른 채로) 어두운 터널 안을 계속해서 걷고 또 걷는 일과도 같다. 그 터널은 어떤 신호도 외부로부터의 교신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그런 데서도 간신히 빛이 보이는 순간 중 하나는 글쓰기가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지속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글 너머의 이야기. 써놓은 글을 통해 누군가와의 대화가 이루어지거나 생각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회를 만나는 일. 그건 혼자의 경험과 감각 바깥에도 삶이 포함돼 있다는 걸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 나의 바깥이 나의 안으로. 그 일부 혹은 전부에 가까운 무언가가 깃드는 순간이다.


글은 써내기 전에 몇 번이고 주워 담을 수 있고 쓰고 나서는 기록의 형태로 남는다. 인스타그램에 축적되어 온 2,800여 개의 게시물과 브런치에 게재해 온 1,080여 개의 글들. 거기엔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기나긴 시간이 응축되어 있다. 그 시간들로 말미암아 쓰인 저 사적이고 평범한 단어와 문장의 흔적들은 이미 손아귀를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그 글을 쓴 사람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해도 거기 남아 있다.


수많은 일들을 겪고 난 '루이스'에게 더 이상 이야기의 시작과 끝, 여정의 출발과 도착은 의미가 희박하거나 그 구분이 확실하지 않은 게 된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에게 '루이스'는 "네 삶 너머에도 너의 이야기는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그리 말한다는 건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어떤 것도 바꾸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다. 내 식대로 쓰자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지금 글을 쓰도록 이끌었으므로 그것은 내게 어느 정도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이 되어 있다. <컨택트>에서 '루이스'가 경험한 모든 걸 영화 바깥의 나는 체험할 수 없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일인지 어떤 느낌의 체험인지는 알 것 같다. 삶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일도 정해진 터널을 관통하는 일도 아닌, 끝내 만날 수 없게 되고야 말 그 삶 이후를 향하여 계속해서 나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매 순간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에 대해 기록하는 일이 삶 너머를 향해 적어도 그 글자 수와 단어 수만큼은 움직여낸다는 믿음을 아직은 가지고 있다. 글을 쓰는 동안 지난날들과 지금인 날과 아직인 날들은 모두 그저 이야기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네 삶 너머에도 너의 이야기는 존재하니까."라는 말의 원문은 "There are days that define your story beyond your life."다. 그 삶이 어떤 이야기인지 정의할 수 있는 건 삶을 초월한 저 너머 어딘가의 몫인데 그것은 언제나 구름 속에 있다. '루이스'의 시선이 가 닿아 있던 바로 그 구름들처럼. 평생 이르지 못할 세계를 향해 수신인 모를 이야기를 계속해서 부친다. 아마 내일도 그렇겠지. (2021.03.27.)


*장석주,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중앙북스, 2015, 115쪽.


영화 '컨택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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