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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pr 07. 2021

사라지고 싶은 표정으로, 아직 사라지지 않은 사랑

넷플릭스 영화 '결혼 이야기'(2019) 리뷰


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2019)는 한마디로 평행선의 영화다. 두 개의 선이 나란하게 평행인 모양을 여기서 꺼내는 이유는 이혼을 결심한 두 사람이 쉽게 이혼 절차를 마무리하지 못하는 동안 일어나는 일들을 영화가 세세히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찰리'(애덤 드라이버)와 '니콜'(스칼렛 요한슨)은 영화의 시작부터 이미 이혼을 결심한 채이며 <결혼 이야기>는 이야기 대부분(거의 전부)을 둘의 현재 시점에 할애한다. 아들 '헨리'(아지 로버트슨)를 돌보는 일과 연극계에 종사하는 두 사람의 경력에 있어서의 변화 등 여러 일로 인해 둘은 이혼 조정을 하는 동안 여전히 부부인 채로, 부모인 채로 LA와 뉴욕을 오가며 지낸다.


영화 '결혼 이야기' 스틸컷
영화 '결혼 이야기' 스틸컷


아무 노트 위에다 평행선을 만들기 위해 두 개의 선을 그리는 상상을 해보면 이런 것일 테다. 먼저 선 하나를 그린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평행이 되게 선 하나를 옆에 더 그린다. 물론 모양은 좀 삐뚤 수 있다. 중요한 건 두 가지다. 선 하나를 그리는 일을 두 번 반복해야 한다는 점과, 두 개의 선은 꼭 떨어져 있지만 더 이상 서로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는 않는다는 점. <결혼 이야기>는 파경을 맞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맞이하지 못한 관계의 지형도를 살피는 영화라기보다 그러한 상황에 놓인 '니콜'과 '찰리', '찰리'와 '니콜' 각자의 표정을 더 주의깊게 살피는 영화다. 영화의 상영시간이 137분으로 노아 바움백 영화 중 가장 길다는 것 역시 마치 인물들의 곁에 더 오래 머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결과처럼 느껴진다. 이야기의 선을 천천히, 그러나 되풀이해서 그리는 영화로 다가온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찰리'와 '니콜'의 내레이션은 각각 서로가 서로의 장점이라 생각하는 것들을 종이에 쓴 것이다. 둘 중 한 사람은 실제로 그것을 읽지 않겠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내용이 마음에 들어 읽어보겠다고 한다. 이혼 절차에 종지부를 찍기 전에 서로에 대해서 한 번 혹은 조금이나마 더 생각할 기회를 마련하기를 바란 조정인의 뜻이지만 <결혼 이야기>에서 그것보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이 "찰리는 경쟁심이 강하다. (...) 정리정돈을 잘한다. (...) 에너지를 절약한다. (...)" 같은 식으로 서로의 특징들을 아주 많이 나열해 쓸 수 있을 만큼 서로를 속속들이 안다는 점이다. 영화 제목이 '이혼 이야기'가 아닌 이유는 물론 이혼 절차를 밟는 동안 법적으로는 여전히 부부 상태이기 때문이겠지만 선을 긋는 일 자체에도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개의 선이 그어지는 (서로의 영향을 받으며 각자의 삶이 나아가는 모양) 과정과 둘 사이에 선을 긋는 (그 서로의 영향을 영영 가로막는) 과정 모두에는 바로 그 '선 긋는 행위'가 공통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드는 데 있어서 평행선을 만드는 일은 곧 선 긋는 행위를 두 번 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아주 세심하고 각별한 시선이 필요하다.


영화 '결혼 이야기' 스틸컷


가령 앞에서 한 사람이 스스로 읽기를 거부한 '상대방 장점 노트'는 영화 후반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의도치 않게 읽힌다. (정확히는 한 사람이 그것을 우연히 발견해 읽고 있고, 옆에서 또 다른 한 사람이 읽기를 함께한다.) 랜디 뉴먼이 작곡한 영화의 스코어는 전반적으로 비슷한 멜로디를 고조시키거나 같은 단음을 반복하는 양상을 통해 완성된다. 두 사람의 대조적인 면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똑같은 상황에 다르게 반응하는 둘의 모습을 굳이 넣기도 한다. 중반에 등장하는 '찰리'의 변호인 '버트'(앨런 알다) 결혼과 이혼을 세 번 반복한 인물이다. 반복의 의미나 상징성 같은 것 정도야 아주 많은 영화에서 찾을 수 있지만 <결혼 이야기>에서의 그것이라면 곧 이 삶 자체가 결혼과 이혼과 같은 관문이나 사건이 아니라 무수히 계속되는 반복적 일상의 과정들로 채워짐을 암시하는 일일 것이다. 식사를 하고 일을 하며 자녀의 숙제를 도와주거나 하는 것들. 삶의 많은 것들은 반복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가니까.


사라지고 싶은 표정으로 아직 사라지지 않은
사랑이 수선되고 있다

(...)

어떻게 이별하고 잊어야 하고 퇴장해야 하는지
계속 물었는데 아무도 대답이 없다

박서영, '미행' 부분,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문학동네, 2019


영화 '결혼 이야기' 스틸컷


차를 탄 채 소실점을 향해 화면 안으로 사라지는 한 사람의 모습과 그것을 아마도 프레임 밖에서 지켜보고 있을 다른 한 사람. 같은 지하철에서 상대를 향한 채 서로 반대편에 앉거나 서 있는 두 사람. <결혼 이야기>는 그런 이미지들의 활용을 통해서도 이들의 결혼과 이혼이 도장을 찍고 또 도장을 찍는 맺음이 아니라 하나의 큰 과정이 되리라는 점을 넌지시 보여준다. '찰리'와 '니콜'이 영화 내내 평행선인 관계를 이어가는 이유는 단지 아이와 직장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자신들의 감정에 대해서도 마주하거나 극복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가도 또 어느새 이혼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법원으로 향하고, 그러다 어느날은 아이와 부모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낮에는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다가 저녁에는 아이와 할로윈 분장을 하고 노는 일이 <결혼 이야기>에서는 곧 서로 뗄 수 없는 현실적 일상 그 자체인 것이다. 날을 세운 채 심한 말을 하다가도 이내 둘은 상대에게 기대거나 상대를 보듬기도 한다. 자기 잘못을 뒤늦게 깨닫기도 하고, 무심한 듯 상대를 챙겨주기도 하고.


처음에는 서로 갈라서기 위해 상대와 일종의 분쟁을 시작한 것이었지만 두 사람은 그러니까 '상대와 분쟁을 해야하는 자신'과 또 다른 반목을 한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두 사람의 영화 이후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결혼 이야기>가 그려낸 멀지 않고 가까운 평행선은 꽤 오래도록 서로 성실히 얽혀 있으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랑의 수선'이라는 말이 반드시 관계 회복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수선되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니까. <결혼 이야기>는 한 가정의 풍경을 그렇게 연민과 품위를 갖고 바로 옆에서 관찰한다. 베개가 묵묵히 담아냈을 각자의 눈물과 숨소리를 잊지 않은 채로.


https://www.netflix.com/kr/title/80223779

영화 '결혼 이야기' 국내 메인 포스터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한때 정말로 소중했던 것들이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상처 입고 괴로워하면서 스스로의 결정에도 매 순간 자문하는 사람들을 <결혼 이야기>는 가만히 살핀다. 법원에서, 아이의 놀이방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등 돌린 채 베갯속으로 얼굴을 파묻는 이의 곁에서. 지키지 못한 약속들과 지켜내지 못한 다짐들 모두, 나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인지도. "평생 사랑할 거야,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이라고 써보는 게 그래서 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노아 바움백 영화가 뉴욕만큼이나 언제나 세밀하게 포착했던 가족과 개인의 일상에 더해, 작중 언급되는 '형사 변호사와 이혼 변호사의 차이'처럼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담으면서도 특별한 연출이 아니라 단지 인물을 클로즈업하는 것만으로도 완성되는 이야기를 만든다.


"형사 변호사는 악당의 최선을 보고 이혼 변호사는 선한 사람의 최악을 보잖아요."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인스타그램: @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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