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시크릿 세탁소>(2019)는 '오션스' 시리즈를 비롯해 <로건 럭키>(2018) 등 그의 필모그래피 연장선에 아주 자연스럽게 포함될 만한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그렇게 큰 이슈가 되지는 않았지만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파나마 페이퍼즈' 사건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 <시크릿 세탁소>는 유사한 소재와 제작 방식의 영화라 할 수 있고 실화 바탕이라는 공통점도 있는 <빅 쇼트>(2015)를 얼핏 떠올리게 한다. 보이지 않는 벽을 깨고 나와 등장인물이 관객에게 직접 상황을 설명하거나 말을 거는 기법이 쓰인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씁쓸한 결말로 향하는 일종의 고발적 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영화 '시크릿 세탁소' 스틸컷
게리 올드만과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연기한 두 명의 변호사 '모사크'와 '폰쉬카'는 '모사크 & 폰쉬카'라는 이름의 로펌 대표다. 서류상 본거지를 파나마 제도에 둔 이 회사는 주로 상류층 혹은 범죄자들이 자금이나 자산을 세탁하기 위해 외국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하도록 돕는 일을 하는데, <시크릿 세탁소>의 도입은 그 세부로 들어가기 앞서 화폐의 기원을 짚는다. "신용이란 대단한 발견입니다.(무겁게)뭘 들고 다닐 필요가 없잖아요!"라며 물물 교환 경제로부터 돈의 발명까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갑자기 친절한 경제 교육?'이라는 생각을 할 즈음 두 사람은 '파생 상품'과 같은 갖가지 금융 상품과 용어들을 무미하게 나열하며 지금 자신들이 말하는 돈 이야기가 화폐의 기원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내비친다.
'대체로 유명인의 얼굴이 새겨진' 돈은 그 자체로는 쓸모 없는 종이일 뿐이지만 그것에 적힌 '100 달러'와 같은 숫자는 명목상의 단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약속이 된다. "이 종이는 100달러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이 합의된 물건입니다."라고 조폐 기관에서 보증하고 사회적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 여기서 좀 더 중요한 개념은 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추상적인 단위의 신용이다. 그것을 기반으로 한 신탁과 같은 '실체 없는' 서류상, 명목상의 존재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신랄하게 파헤치기 위한 영화 내용의 전제 조건으로 작용한다.
영화 '시크릿 세탁소' 스틸컷
크게 다섯 개의 작은 장으로 구성된 <시크릿 세탁소> 1장의 제목이 곧 이 글의 제목이다. '온유한 자들은 사기를 당한다'(The Meek Are Screwed). 남편과 여행을 떠났다가 배가 침몰하는 사고로 졸지에 남편을 잃은 '엘렌'(메릴 스트립)은 보험사로부터 황당한 소식을 듣는다. 배를 운영하는 회사가 든 보험이 또 다른 보험회사에 의해 '재보험'(Re-Insurance) 되어 있는데 몇 가지 이유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적은 합의금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편과의 추억이 있는 라스베이거스의 한 콘도를 찾았다가, 자신이 아닌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자신이 지불한 것보다 거액의 현금을 내고 그 콘도를 구입했다는 소식을 부동산 중개인으로부터 접한다. 콘도 매입자는 외국인이며 자산의 근거지 역시 외국에 있다는 이야기가 뒤따르는데 공교롭게도 자신이 사고를 당한 배와 마찬가지로 같은 보험회사에 의한 '재보험'에 그 콘도를 산 사람도 속해 있다. '엘렌'은 변호인을 통해 각종 문서를 기반으로 '서류상 보험'의 실체를 찾아 나선다.
'파나마 페이퍼즈' 사건은 파나마 제도,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등 이른바 '조세 피난처'로 알려진 지역에 유령 회사를 설립한 여러 나라의 정치인, 범죄자, 연예인, 기업인 등의 명단과 앞서 언급한 '모사크 & 폰세카'의 내부 문서들이 공개된 사건이다. 엄밀히 말해 외국에 회사를 세우는 일 자체가 위법은 아니며 따라서 '파나마 페이퍼즈'의 명단에 들어간 인물들 모두가 비윤리적 행위를 저지르거나 자금을 세탁한 인물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가령 신분이 노출된 유명인의 경우 자신의 사생활과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서류를 활용하기도 한다. 문제는 법 테두리 안에서 어떤 사람이 이익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이 손해를 보며, 어떤 사람이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잃는 동안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일 테다.
<시크릿 세탁소>는 '모사크 & 폰세카'의 운영 주체인 두 사람의 시점에서 사건들의 배후와 내막을 풍자적으로 소개하면서 '엘렌'을 비롯한 당사자들의 사연도 상세하게 다룬다. 각각 다른 인물들이 중심이 되는 1장부터 5장까지의 구성이 아주 유기적으로 느껴지지는 않고, 각각의 비중을 할애하는 과정에서 균형 감각도 이전까지의 소더버그 영화들과는 조금 이질적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각종 제도와 법 장치들이 과연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 주었는지, 누군가가 웃는 만큼 한쪽에서 다른 누군가는 울고 있지 않을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영화를 이미 극장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아담 맥케이의 <바이스>(2018)가 그것이었는데, 마찬가지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나와는 상관 없다고 여길 만한) 일들이 어떻게 '뉴스'가 되었는지 돌아보게 하는 영화가 <시크릿 세탁소>다. '파나마 페이퍼즈' 폭로 이후 수감되었던 '모사크'와 '폰세카'는 3개월 만에 풀려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