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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04. 2021

5천 개의 에버노트, 그리고 4월에 만난 책

읽고 쓰고 이야기 듣는 나날


#1. 5,000개의 에버노트


지금껏 주로 쓰고 있는 기록 도구인 ‘에버노트’(Evernote)의 첫 번째 노트는 2012년 7월 12일에 쓰였다. 마지막 노트는 2021년 4월 17일에 쓰이고 있다. 노트의 수가 총 5,016개를 가리키고 있으니 산술적으로는 하루 평균 1.56개의 새 노트가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실질적으로 영화 기록을 처음 시작한 건 2013년 7월부터의 일이므로, 이 수치에는 약간의 부풀려짐이 있다. 게다가 다수의 노트는 별 쓸모없는 일기에 가깝거나 책에서 읽은 말들을 옮겨 담아두는 등 직접 쓰지 않은 것도 포함된다. 그렇다 해도, ‘새 노트’ 버튼을 누르는 오천 하고도 열여섯 번의 행위들이 결국 지금의 내 일부이자 어쩌면 거의 전부에 가까운 무엇이지 않을까.

첫 번째 노트는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리더스북, 2011)에서 한 대목을 메모한 것이다. “침묵은 충동에, 감정에, 유혹에 흔들리는 나를 관찰하고 경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침묵의 순간 세계에 대한 사색이 시작된다. 침묵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 이상이며, 관성에 의한 모든 행위를 멈춘다는 의미다. 그래서 타인과 외부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열정이다.” (31쪽)


에버노트에 저장된 5,016개의 노트. (4/17 기준)


자신이 남긴 수많은 기록들은 결국 그 자신을 정의하는 요소이자 조각들이며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구성하거나 규정한다. 어떤 책을 읽었고 누구를 만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요즘은 기록 행위에 있어 양적 측면보다 질적으로의 성장이 스스로에게 필요하다고도 자주 생각하지만, 어떤 경우와 분야에 따라서는 양 자체가 곧 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믿음을 여전히 갖고 있다.

그러니 5,016개의 노트들이 나를 그 기록들이 쓰이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나로 만들어낸다. 이건 곧 살아가는 방식이자 태도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늘은 정혜윤의 책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아무튼, 메모』(위고, 2020)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때의 노트들은 이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메모들은 지금의 내 삶과 관련이 깊다. 나였던 그 사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에 노트에 쓴 것들이 무의식에라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어느 날 무심코 한 내 행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믿는다. 이게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35쪽) (2021.04.17.)


"행복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놀라운 우여곡절 끝에 정직한 통로를 거쳐서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163쪽)



#2. 착해지는 기분이 들어


"'정성껏'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내게 음식과 요리는 일상적인 행위인 동시에 사람과 삶을 한층 더 정성껏 바라보게 하는 대상이었다. 마음 안에 차오르는 길고 내밀한 언어들을 납작하게 접은 채 '좋아요' 하나로 반응을 보이면 그만인 세상에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요리는 확실히 비효율적인 행동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는 감정의 맥락과 소통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취할 때의 마음을 구별하게 된다. 한 그릇의 요리에 담긴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이은선, 『착해지는 기분이 들어』(아르떼, 2021)


느슨한 의미의 선배이거나 동료이거나 혹은 같은 분야의 종사자로 접하게 되는 이들이 여럿 있다. '이 사람처럼 쓰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수십 명쯤은 되지만 매체 객원 에디터 생활을 하고 마케팅 에이전시를 거치면서 여러 계기로 조금 더 (혼자만의) 내적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기자나 작가, 평론가 등이 특별히 몇 분 있는데, 오늘 북토크를 소식을 듣자마자 신청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리고 소규모로 진행된 탓에 내가 마지막 신청자가 되었다!)


봉천동 '관객의 취향'에서, 4월 29일


"하겠다고 명명한 순간 그것을 해야 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 있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즐겨 보았다거나 영화 매체에 빈번히 노출되는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어도, 어떤 영화는 문득 그렇게 다가오고 그건 어떤 책도 글도 마찬가지가 된다. 불확실함을 가득 안은 채로, 그러나 정성과 성실을 담아 무언가를 계속하다 보면 그게 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시간이 들어가고 생각과 마음을 더 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글쓰기도 요리와 닮았는지 모른다. 영화를 만드는 일이 책을 만드는 일과 유사해지는 지점이 있는 것처럼 글을 쓰기 위해 글감을 들여다보고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도 자리에 남아 있는 일이 식재료를 만지고 음식을 향유하며 같이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았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같은 분야의 다른 사람들의 활동과 걸음을 응원하고 지켜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에는 "성실한 우정"도 있고 가능한 좋은 것을 찾고자 하는 마음도 있겠다.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고 그리는 사람의 다감하고도 깊은 이야기와 마디마디의 경험담 덕분에, 응원받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들으며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한 저녁. 퇴근시간이 조금 늦어져 식사를 하지 못하고 간 북토크 자리였지만, 배가 부른 기분이 되었다. 오늘도, '계속하기'를 지속할 용기 같은 것을 얻은 채로 관객의 취향을 나섰다. (2021.04.29.)


이은선 기자님의 북토크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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