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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Feb 09. 2021

1월,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기록의 과정

바라만 보며 망설이다 이내 페이지를 덮어버리길 반복하기도


"대략 10년 전 번역이거든요? 근데 그 세월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사람이 쓰는 언어는 또 어떻겠어요. 말이라는 게 원래 사라지기도 하고 태어나기도 하고 그러는 거니까."

"아까 비슷한 대사 본 거 같은데."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영화니까. 근데 뭐 말만 사라지나? 인공 지능 시대에 사라질 확률이 높은 직업 중에 번역가도 있대요. 하긴 뭐, 지하철도 무인으로 운행되고 그런 시대인데 뭘. 기계가 사람의 자리를 대체하는 거지, 뭐."


"세상 모든 게 다 기계로 대체돼도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요?"

"음, 뭐가 있을까. 아 운동선수, 대체 안 되겠네."

"음... 다이아몬드 리그라는 게 있는데요. 저번 대회에서 몇 가지 종목이 사라졌어요. 그 사라진 종목 중에 200m 달리기도 있었고요."

"종목이 사라져요?"


"관심이 없어서. 그러니까, 대체할 순 없어도 관심이 없으면 사라지는 거겠죠. 종목도, 사람도. 나는... 달리지 않는 걸 선택했을 때 내 인생에서 달리기가 사라진 줄 알았어요. 근데, 여태 뛰었던 것들에만 미련이 남은 줄 알았는데 앞으로 뛸 것들에도 미련이 남아 있더라고요."

"기선겸 씨 같다. 방금 본 영화에 대한 내 감상이에요. 사라지지 마요. 나한테 계속 남아 있어요."

"안 사라질게요. 계속 남아 있을게요."


([런 온](JTBC, 2020), 11화 '미주'와 '선겸'의 대화 중에서)


드라마 '런 온'
"영화 어땠어요?"

#1.


지금 생각하고 느낀 것들이 어느 날에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될까 봐,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마저도 잊힐까 봐, 사라지는 것과 흔적 없이 부서지고 퇴색되는 것이 두려워 지금을 기록하는 일에 기대어 의지하게 될 때가 있다. 삶 너머에도 이야기는 존재하겠지만 그 이야기의 대부분도 한 삶이 지나가고 나면 서서히 흩어지고 희미해질 테니까. 다만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만큼은 어딘가에 남겨두고 싶어서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면 좋은 쪽으로 남기를 원해서 기록은 멈추지 않고 계속 쓰인다. 하지만 생각과 감정과 기억을 가득 안고 노트를 펼치고 커서를 깜빡이다가도 그것을 한참 바라만 보며 망설이다 이내 페이지를 덮어버리길 반복하기도 하는 것이다.


기록하는 일이 결과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과정으로서 과정으로써 계속되는 것이라고 늘 믿어왔지만 요즘은 그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한다. 어떤 뜻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에 기반한 기록 전부가 다 가치 있게 되고 남을 만한 자격이 부여되는 건 아니어서. 그러니 이런 질문이 뒤따른다. 내 기록은 누군가 남아 있어야 한다고 여길 만한 가치 있는 기록일까, 사라지지 않을 기록일까, 그걸 남겼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을 만한 무엇일까. 쏟아지는 생각과 감정들 앞에서, 주저하거나 썼던 것을 지우거나 생각했던 것을 다시 생각하는 것도 전적으로 그런 이유에서다. (2021.01.24.)


https://brunch.co.kr/@cosmos-j/1204


https://brunch.co.kr/@cosmos-j/1205



김상욱, 『떨림과 울림』에서


#2.


"헵타포드의 경우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었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대신, 그들은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했다. 그렇다. 어떤 대화가 됐든 헵타포드들은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4주에 걸친 관객의 취향 [써서 보는 영화] 온라인 수업을 마친 저녁.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읽는 것보다 이미 보았고 이미 읽었던 것들을 다시금 들추는 사이 한 달이 지났다. 거기에는 썼던 것들을 다시 만나는 시간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써놓은 글을 다시 읽다 보면 그런 생각도 든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어차피 삶이 계획한 대로만 되지 않지만, 그 언어들이 단지 정보에만 그치지 않고 어떤 움직임이 될 수 있을까. 정보에만 그치는 언어가 아니라 삶의 어떤 선언과도 같은 기록이었으면 좋겠다. (2021.01.31.)


영화 '컨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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