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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08. 2016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혼자가 될 수 있었다.

2015년 5월, 전주

작년 5월, 아니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 전주를 다녀왔다. 전주국제영화제를 계기로 방문한 것이었지만 단지 계기였을 뿐, 내가 간 시점은 영화제가 폐막할 무렵이었고 실제로 영화제 상영작을 보지도 않았다. 전주라는 낯선 곳에 발자국을 남겨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용산역에서 아침 기차를 타고 가서, 밤 기차를 타고 다음날 새벽에 돌아왔다. 그런 전주에 내가 부여할 수 있는 의미란, 누군가의 도움이나 안내 없이 혼자 돌아다닌 첫 여행이었다는 점에 있다. (물론 몇 군데 장소 추천을 받기는 했다!)


오전 11시 30분 경 도착한 전주역.


얼마나 준비 없이 떠난 여행이었는지는 내가 사전에 계획한 유일한 것이 "한옥마을에 간다면 사람 많고 시끌벅적한 거리 대신 외곽을 걸어보자"였던 데에서 알 수 있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내게 5월 초의 전주는 이미 더운 곳이었지만 서울이 아닌 곳을 나 혼자 걷는다는 것이 얼마만일까 싶을 만큼 날씨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거의 해마다 부산을 찾았지만 언제나 부산에 사는 형과 함께였다. 간단했던 아침 식사 덕에 배가 고파질 무렵에 도착한 나를 처음 맞이한 것은 한옥을 연상케 하는 전주역의 모습이었다. 전주에 사는 지인과 점심식사를 한 것을 제외하면 나는 그날 하루 내내 혼자였다. 4층 높이에서 한옥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어느 게스트하우스 겸 카페에서 글을 썼다. 전주를 방문하기 며칠 전 서울에서 본 영화에 대한 글이었다. 잠시 책을 읽었던 것도 같다. 이렇게 적은 것은 무언가 읽을 거리를 가지고 가긴 했는데 그게 뭐였는지 기억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고서점에서 DVD 두 개를 샀고, 서점에서 영화 주간지를 샀다는 것은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전주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보다는 그저 전주에 다녀왔다는 사실 자체가 더 핵심적으로 각인된 모양이다.


오목대에서 바라본 한옥마을의 야경.
나무에 가려진 풍경마저도 자연스러웠다.

전주에서의 단 하나의 순간을 택해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한옥마을의 야경을 내려다 본 것을 언급할 것이다. 콩나물국밥으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오목대에 올라갔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커피를 마셨던 카페는 물론이고 한옥마을의 전경과 전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풀벌레 소리가 들렸고, 멀리 조그맣게 달이 보였다. 어떤 지점에서는 그 풍경이 나무에 가려지기도 했는데 그것마저 원래 거기 있어야 할 것처럼 여겨졌다. 전주라는 낯선 곳에서 혼자 보내며 바라봤던 것들 중 유일하게, 누군가와 함께 그 광경을 바라보면 좋겠다고 여겨질 만큼이었다. 온전한 혼자의 하루로 마무리되기 위한 조짐이었는지 그 저녁에 연락했던, 또 다른 지인과는 만나지지 않았다. 누군가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다행이었다. 몇 장의 사진을 찍은 것을 제외하면,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별 다른 움직임 없이 선 채로 있었다. 그동안 몇 명의 여행객들이 내 뒤를 지나갔고, 나는 그림의 일부가 된 것처럼 생각에 잠겼다. 대학을 갓 졸업한 후 앞으로의 커리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어느 워크샵을 수강 중이던 막바지에 찾은 전주는 그 수업보다 더 알찬 곳이었다.


전주에 서울처럼 지하철이 깔린 게 아니고 버스 이용을 그다지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편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자유롭게 택시를 타고 돌아다닌 것도 처음이었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의존적이었다. 그러나 2015년의 전주는, 나의 주체적인 장소였다. 혼자 마신 몇 잔의 커피는 그 기록이자 기억으로 함께였다. 평소 활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것들을 좋아하는 나는 그럼에도 몇 군데의 행선지를 대충 정해둔 채 일정에 구애 받지 않고 여행하며 헤매는 그 시간이 정말 가치 있다는 것을 그날 깨달았다. 새로운 구상을 하기에도, 머리에 든 것들을 정리하기에도, 혹은 휴식을 취하기에도 부족함 없는 곳이었다.


카페들 기웃거리느라 하루 동안 커피만 네 잔은 마셨다.

또 언제 전주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곳에서 나는 훗날의 시간을 잠시 거닐었다. 지금의 내게는 그곳에서 흘렸던 땀이나 마셨던 커피 맛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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