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Sep 05. 2021

경험한 적 없는 꿈 하나쯤은 있지 않은지

다시 본 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 리뷰

*'클래스101'에서 <취향이 더 깊어지는 영화 에세이 쓰는 법> 클래스의 수요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링크를 통해 '응원하기'로 참여해주세요.


https://class101.page.link/DmCf



계절 한가운데에 있으면 늘 작년과 비교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작년과 올해 여름 중 언제가 더 더웠는지 생각해보는 식이다. 아무리 한여름이어도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날과 하루 종일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 공존하기 마련이므로, 이 비교는 날씨가 아니라 분위기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여름날의 분위기. 종종 이것은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된다.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를 거쳐 작년 여름 극장에서 만난 보물과도 같은 영화 중 하나가 바로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2019)이다. 주인공 ‘옥주’(최정운)는 예뻐 보이고 싶어서 쌍꺼풀 수술을 해달라고 아빠에게 조르는가 하면, 아빠와 이혼한 엄마가 동생 ‘동주’(박승준)를 찾아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겨 ‘동주’에게 엄포를 놓기도 한다. 아빠의 경제 사정으로 할아버지네 이층 집에서 방학을 보내게 된 남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서서히 무언가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돌보는 일이라든지 아빠와 고모 사이의 서로 서운한 일, 고모가 숨기고 있던 불화, 그리고 승합차를 타고 운동화 노점상을 하는 아빠의 속사정 등 영화 내내 ‘옥주’의 시선에서 펼쳐진다. 그러면서도 모기장 안에 누가 들어가 잘 것인지를 둔 ‘옥주’와 ‘동주’의 신경전이나 콩국수나 비빔국수 같은 여름 별미로 계절의 생생함을 더한다. 마당의 식물들에게 물을 주는 할아버지의 웃음이나, 햇살 아래 2층 테라스에서 빨랫줄에 빨래를 널어놓는 장면 등 소박하고 일상적인 순간들 역시 빛난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세트가 아니라 오랜 사람의 흔적들이 담긴 집을 실제 로케이션으로 사용한 덕분이기도 하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계절은 지나간 뒤에도 존재감을 남긴다. 그렇다면 그 계절을 같이 보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름방학이라고 하면 한철에 불과하겠지만, 이 이야기 속 ‘옥주’에게라면 그것은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눌 만큼의 것이 된다. ‘옥주’가 직접 겪거나 전해 듣는 영화 속 일들에는 우리 인생의 경험이 집약되어 있다. 삶에는 자기 뜻대로만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 많다는 것,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일도 많다는 것, 유년기의 아주 사소한 일도 어른이 되고 난 뒤에도 불현듯 떠오를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직접 기억하고 있지 않은 일도 꿈의 형태를 통해 마치 겪은 일처럼 기억할 수 있다는 것. 어떤 장면에서 ‘옥주’의 고모는 어릴 적 자신의 엄마가 포대기로 감싼 자신을 안고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는 모습이 생각난다고 말하는 데 그건 본인의 기억이 아니라 꿈 이야기다. 아빠는 자기 어릴 때 아빠(‘옥주’의 할아버지)가 학교에 가야 한다며 저녁 여덟 시 반에 능청스럽게 깨우던 장난을 회상한다.


지나간 여름날. 영화가 끝난 뒤 ‘옥주’의 기억에 자리 잡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이미지는 가령 이런 것이다. 모두가 잠든 밤 할아버지는 홀로 병맥주를 마시며 오디오로 김추자의 ‘미련’을 듣는다. 문득 잠에서 깨어 그 모습을 본 ‘옥주’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 않고 2층 계단에 가만히 앉아 그 노래를 같이 듣는다. 모두에게 지난 시절이 있다는 것. 말하지 않았고 어쩌면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지나간 계절처럼 고이 간직하고 있는 하나의 시절. ‘옥주’는 이 여름방학을 보내며 다른 여름보다 조금 더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시절이 될 것이다.


조금 전 언급한 노래 ‘미련’은 신중현이 작사, 작곡한 것인데 라디오 등을 통해 영화에서 총 세 번에 걸쳐서 흘러나온다. 세 번인 이유는? 영화에서 할아버지-아빠-‘옥주’에 이르는 ‘삼대’의 이야기가 다뤄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옥주’ 또한 아빠와 이혼한 ‘엄마’에 대해 여러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게 어떤 종류의 감정인지 <남매의 여름밤>은 정확히 적시하지 않지만 그것을 ‘옥주’가 꾸는 어떤 꿈을 통해 관객에게 넌지시 보여준다. 벌써 입추도 처서도 지났다. 서서히 가을을 맞이하는 9월, 당신의 여름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하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본 리뷰는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2021년 9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s://www.kma.go.kr/kma/archive/pub.jsp?field1=grp&text1=skylove&field2=pubGroup&text2=2021#gal_cate3



*클래스101 '취향이 더 깊어지는 영화 에세이 쓰는 법' 응원하기 페이지: (링크)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매거진의 이전글 오락영화의 간단하고 명민한 기획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