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윤희에게'(2019) 리뷰
“그렇게 충만했던 시절은 또 오지 못할 거야.
모든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전 일이 돼 버렸네.”
-윤희의 편지
그런 시절이 하나 있었다. 20년이 지났지만 떨쳐내지를 못하고 기어이 꿈에도 등장시키게 되는 시절, 사람. 현재에 부재한 것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마음이기도 하다. 그건 따뜻했던 계절을 추워진 계절에 와 생각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연말이 되어 한 해를 돌아보는 것과도 닮았다. 눈이 거의 무릎까지 쌓였는데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홋카이도 오타루 시를 배경으로, 이미 시작되었으나 봉인된 채였던 ‘윤희’의 이야기는 딸 ‘새봄’(이 이름에도 주목해둘 만하다)에 의해 다시 시작된다. 임대형 감독의 영화 <윤희에게>(2019)다.
공과금 고지서들 틈에 섞인 일본어로 된 편지 한 통. 엄마에게 도착한 서신을 딸은 몰래 읽었다. 그 편지는 일본에서 ‘쥰‘이 썼지만 부치지 못한 것이었는데, ‘쥰’의 고모 ‘마사코’는 무심히 (거의 일부러)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잘못 보내진 편지, 혹은 숨기지 못한 편지로부터 많은 이야기들이 시작되고는 하니까. 이 편지의 각각 수신인이고 발신인인 ‘윤희‘와 ‘쥰’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엄마의 사연이 궁금해진 ‘새봄’은 엄마를 데리고 오타루를 직접 찾아간다. 직접 하지 못하는 이야기는 곁의 누군가 대신해줌으로써 재개되거나 완성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엄마의 이야기를 딸이 함께 다시 쓴다.
“겨울의 오타루엔 눈과 달, 밤과 고요뿐이거든.”
-쥰의 편지
<윤희에게>의 계절적 배경이 겨울인 건 처음에 언급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1995)를 본 관객이라면 아마 짐작하겠지만, 오타루 시는 눈이 정말 많이 오는 곳이겠다는 걸 <윤희에게>의 몇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쥰‘과 ‘마사코’가 수시로 집 앞 눈을 치우는 장면에서 ‘마사코’는 눈이 치워도 치워도 또 쌓이고 쌓이는 일을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무력감에 빗대어 말한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말하면서도 정말 눈이 그치기를 바라는 뜻은 거기 담겨 있지 않다. 이 말은 단지 하나의 주문이다.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며 그렇게라도 중얼거려야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어서. 그치는 게 언제일지는 막연하지만, 말 그대로 ‘언젠가’는 눈이 멈출 것이라는 바, 우리는 그걸 알고 있다.
‘윤희’와 ‘쥰’이 서로에 대하여 품고 있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한두 해도 아니고 스무 해나 흘렀다는 건 무력감을 준다. 그때는 각자의 사정이 있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했지만 훗날 회상하면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서 도망쳤던 것이다. ‘윤희’도 ‘쥰’도 그걸 알고 있다. 때문에 ‘쥰’은 자기가 쓴 편지를 차마 직접 보내지 못했고 ‘윤희’는 오타루에서 ‘쥰’을 마주칠 뻔하자 곧장 벽 뒤에 숨어버린다. 그때는 그저 한 계절이었지만, 스무 번의 겨울을 지나고 나니 두 사람은 스무 번의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갖고 스무 번을 뒤돌아 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행인 것은 지나간 시절에 대해 ‘윤희’도 ‘쥰’도 변명거리를 덧붙이거나 스스로를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윤희’는 편지에 “불행했던 과거를 빌미로 핑계를 대고 싶진 않아”라고 썼다. ‘쥰’ 또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내가 부끄럽지 않아.”라고 편지에 썼다.
눈 뭉치를 만들며 장갑을 한쪽 손에만 끼고 있어도, 자꾸만 눈이 내리고 히터 앞에서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쓴 채여도 <윤희에게>의 겨울은 어쩐지 춥지 않게 느껴진다. 단지 회상되기만 하지 않고 현재 시점에서 가까운 다른 누군가(‘윤희’에게는 ‘새봄’, ‘쥰’에게는 ’마사코’)에 의해 생생하고 가만히 보듬어지는 이야기여서 그럴까. 이 영화가 부치지 못한 편지를 고치고 고쳐 용기 내어 우체통에 넣는 모습은 따뜻하다. 동지가 지나고 해가 서서히 길어지는 1월이다. 만약 꿈에 누가 나왔다면, 자고 일어나니 바깥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다면, 그에게 써두었던 편지를 꺼내 봉투에 잘 넣어 보내보겠다. 그러면 아마도 이런 추신이 쓰인 회신이 올 것이다. “나도 네 꿈을 꿔.” 그 편지가 올 무렵은 새로운 봄의 문턱일 것이다.
*본 리뷰는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2022년 1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