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청자이자 독자가 될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고 싶어 한다. 빠뜨린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두고 온 무언가를 그리워하면서 끊임없이. 모든 아름다움에는 겉에서 헤아릴 길 없는 아득한 깊이가 있다고 하는데, 이야기꾼 중 어떤 이들은 그 세계를 눈앞에서 활자의 기억으로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알고 있는 것과 좋아하는 것과 믿는 것들과 지나온 것들 모두가 거기 담겨 있는데, 시작은 단지 하나의 소풍이었을 것이다.
⠀
우리는 책갈피를 어디다 꽂아 두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때로는 마음만이 아는 것을 글자로 되살리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성복, 『무한화서』)으로, 한 사람에게서 다른 한 사람에게로 다만 되풀이될 따름이다. 이것은 어디서부터 언제 시작되고 있었던 거지?
⠀
웨스 앤더슨 세계에 한두 번 이상 거쳐갔던 모든 얼굴들이 마치 이 세계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등장해, 청자이자 독자인 나를 흔들어놓는다. 어쩌면 이 이야긴 그저 찾는 이 드문 잡지 하나의 조그만 섹션 한 귀퉁이의 부고 정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능히 하나의 우주가 된다고. 하지만 빛나지 않더라도 당신은 분명히 거기 있다고, <프렌치 디스패치>(2021)의 몇 명의 내레이터는 계속해서 들려주고 말해준다. 그들은 누군가 급히 휘갈긴 흔적 앞에서도 멈춰 서 거기 무엇이 있는지 골몰한다. 그들은 지난한 슬픔을 꾹꾹 소화해낸 뒤 이 울음 가득한 이야기를 울지 않고 써낸다. 원래 그럴 작정이었다는 듯이. 그들은 이야기꾼의 중립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2021.12.20.)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The King's Man, 2021), 매튜 본
<The King’s Man>은 어떻게 <Kingsman>이 되었는가: 소중한 누군가를, 가치를,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과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오랜 시간을 갇혀 있어야만 했던 사람은 어느 순간 멈춰 있었던 삶을 다시 살기로 결심하며 아픈 다리를 딛고 액자 속의 어떤 얼굴을 바라보며 일어선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해서 살고 있다는 결연한 기분과,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눈을 감고도 내내 떠올릴 수 있는 변치 않는 마음이 그를 행동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이런 생각이 있다. 만약 그 사람이라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 첫 번째이며, 나 또한 그렇게 살아야겠다, 하는 것이 두 번째다. 그것은 소중한 사람을 다시 잃지 않기 위하여 평화를 수호하겠다던 원칙을, 바로 그 희생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스스로 깨뜨리는 일을 가능하게도 만든다. (2021.12.21.)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좌),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우) 스틸컷
<퍼스트 카우>(First Cow, 2019), 켈리 라이카트
네바다, 사우스 다코타, 네브라스카 등지에서 촬영한 <노매드랜드>(2020)를 볼 때의 감흥이 오리건에서 촬영한 <퍼스트 카우>(2019)를 보면서 비슷한 방식으로 전해졌다. 지금은 떠올리기 어려운 야생적이거나 목가적인 이미지들. 거기에서 만난 이야기를 통해, 기억에 남는 건 주인공들의 이름보다는 그들 사이의 관계성과 그들이 함께 꾸었던 꿈이었다. 19세기의 누군가가 바라보았던 밤하늘과 강가와 촛불, 그들이 밟았던 흙의 내음과 우유로 만들었던 빵의 냄새까지도 전해지는 기분. 주(State)가 되기 전 '준주'(Territory)였던 곳에서, 젖소가 흔해지기 이전에 '퍼스트 카우'(First Cow)를 가지고, 떠돌던 이와 이방인인 이가 정착과 부를 이루어내고자 했던 일들이 있었다. 영화의 시나리오 각색은 물론이고 원작 소설을 집필한 조너선 레이먼드는 직접 경험하지 못한 19세기의 세계를 상상하며 이 이야기를 써 내려갔겠지만 관객인 나는 4대 3의 스크린을 통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곳을 그리워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가 있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의 빛나지 못했던 삶들을 토대로 수많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영화가 있게 되자 그것들은 미지를 건너 여기로 다가왔다. 아니, 빛나지 못했다는 건 진실이 아닐 것이다. "우린 곧 계속 갈 거야"라고 하는 말과, "(네 곁에) 내가 있잖아"라고 하는 말들이 거기 있었으니까. 이 영화를 올해가 가기 전에 만날 수 있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2021.12.25.)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 2021), 제인 캠피온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1993)나 <브라이트 스타>(2009) 같은 영화를 기억하는 이라면 12년 만의 장편인 <파워 오브 도그>(2021)가 각별하고도 반가운 작품이 될 것이다. 각색 연출 촬영 음악 어느 하나 빠짐없이, 이렇게 우아하고도 서늘하고 깊이 있는 시네마를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위치에서 계속해서 선보일 수 있는 감독이 있다는 것 자체가.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여성 필름메이커의 활약이 돋보였다고 해야 할 텐데, <파워 오브 도그> 또한 그 연장선에 둘 수 있겠다. (2021.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