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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15. 2022

날씨를 기다리는 일은 꼭 기적과도 같아서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2020)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컷


자연과 달리 사람이 만든 것들은 계속해서 빠름과 편리함을 추구한다. 상대가 읽었는지 여부도 알 수 없는 40자 메시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며 설렜던 때를, 아니,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은 편지가 얼른 도착하길 기다렸던 때를 기억하시는지. 영화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시기에 시간을 내서 극장에 가야만 보던 영화를 이제는 여러 OTT 플랫폼에서 언제든 볼 수 있고 멈추거나 앞뒤로 건너뛸 수도 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는 건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날씨 이전에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라서 그렇다.


초등학교 운동회의 어떤 장면이 있다. 소년은 달리기 시합을 하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났을 때 다른 아이들은 벌써 결승선을 통과해 서로 환호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 소녀는 ‘참 잘했어요’ 도장을 손등에 찍어주기 위해 소년을 기다렸다. 소년은 소녀의 체육복에 적힌 이름을 기억했다. 잠시 뒤, 수돗가에서 팔꿈치의 상처를 씻어내는 소년은 백군이다. 물로 흙을 털어내는 소년에게 아까 그 도장 찍어준 소녀가 다가와 손수건을 건넨다. “넌 청군이잖아”라는 말에 소녀는 파란 모자를 뒤집어 안의 흰색이 보이도록 고쳐 쓴다. 어떤 사소한 기억은 잊을 수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컷


시간이 흘러 각각 서울과 부산에서 편지를 주고받게 된 두 사람. 어렴풋한 기억에 의지해 몇 차례 답신이 오가고, 둘은 “12월 31일에 비가 오면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함박눈이나 단풍 낙엽처럼 특정 계절에만 볼 수 있는 게 있는 반면 비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소년은 “하느님이 울면 비가 내리는 줄 알았다”라 하고 소녀는 “하늘이 지치면 비가 온다고 생각했다”라며 비에 대한 유년의 생각을 떠올린다. 언제든 내릴 수 있지만 아무 때고 항상 내리는 것은 아니니 비야말로 감정이나 의미를 투영하기 좋은 날씨다.


아쉽게도 저 약속을 하고부터 8년 동안의 12월 31일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걸 알 리 없던 소년은 재수 학원에서도 군 복무 중에도 어김없이 약속 장소에 우산을 들고 나와 기다렸다. 이제 학교는 사라지고 공원이 되었지만 맑아도 구름이 껴도 그는 기적을 믿었는지 모른다. 사막에 100년 만에 눈이 왔다든지 남극에 비가 많이 왔다든지 하는 보기 드문 기상 현상이 실제 일어나기도 하니까. 비를 기다리다 끝내 지쳐 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그는 아마 “내년엔 오겠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리는 것도 ‘비가 올 때까지 지내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12월 31일에 비가 오길 바란다는 건 편지 너머의 수신인을 만나길 기다린다는 뜻이다. 우산 공방을 운영하는 남자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기성품이 아니라 원하는 색상, 그림, 문구 등을 넣은 세상 하나뿐인 우산을 만든다. 기다리는 건 시간을 요하므로 비효율적이기 쉬운데, 아이러니하게도 남자의 우산 공방이 유지되는 건 비가 항상 내리는 게 아니라 내릴 때를 알거나 가려서 내리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비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을 테고 우산 공방은 장사가 안 돼 문을 닫아야만 할 것이다. 그는 비를 기다리기 때문에 우산을 만든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컷

“생각해보면 내 20대는 우산과 비슷한 것 같아. 매번 잃어버리고, 녹슬고, 끊어지고, 없어지고. 생긴 것도 마냥 똑같고. 그래도, 잊지 못할 시절이었어.”


몇 년의 시간이 지나 남자는 소중한 기억을 남겨준 유년을 돌아본다. 그날의 달리기에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결국 결승선에 들어섰던 것처럼, 원하는 바를 못 이루거나 어떤 만남이 성사되지 않아도 그는 다른 형태의 기적이 앞으로의 삶에 또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어떤 희망이나 꿈은 종종 우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어쩌면 우린 아직 끝까지 다 기다려 본 게 아니라고, 우산을 들고 있으니 비가 오면 그것을 펼치면 된다고 이 이야기는 말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쓰고 보니 1월호에 쓴 <윤희에게>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도 편지 이야기가 되었다. 이 글을 당신이 읽을 무렵이면 여전히 좀 춥지만 그래도 쌓였던 눈이 녹고 있을까. 살면서 원하는 것을 모두 다 이루지는 못한다. 그러나 희망하길 멈추지 않으며 어떤 이는 몇 년을 같은 자리에서 기다린다. 편지, 전화, 사람을. 조지 엘리엇의 소설 『플로스 강변의 물레방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가 이 땅을 이토록 사랑할 수 있음은 이 땅에서 보낸 유년 시절 때문이며,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따던 그 꽃들이 봄마다 이 땅에서 다시 피기 때문이다.” 봄을 맞는 내게, 그리고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편지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포스터

*본 리뷰는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2022년 3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s://www.kma.go.kr/kma/archive/pub.jsp?field1=grp&text1=skylove&field2=pubGroup&text2=2022#gal_cat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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