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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26. 2022

슬픔 뒤의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게 만드는 풍경들

영화 '사랑 후의 두 여자' 리뷰

*본 글은 판씨네마(주)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내용과 평가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사랑 후의 두 여자' 스틸컷


여객선을 타고 난간에 기댄 채 멀리 절벽의 한 겹이 무너져내리는 광경을 보는 여인이 있다. 그는 지금 막 상실을 겪어내는 중이었다. 사랑을 위해 종교를 바꿀 만큼이었던. 영국과 파키스탄의 시차를 넘어, 테이프에 목소리를 담아 녹음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 사랑에 진심이었던. 그런 '메리'(조안나 스캔런)는 지금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 북부 던커크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자신이 모르는 가족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 '사랑 후의 두 여자'


영국 감독 알림 칸의 장편 데뷔작인 <사랑 후의 두 여자>(2020)는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을 비롯한 유럽 여러 영화제에서 각광받은 뒤 국내에서는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었다. 올해에는 영국 아카데미(BAFTA)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조안나 스캔런) 수상, 작품상/감독상/데뷔작품상 노미네이트로 시상식 시즌의 주요 화제작 중 하나로 꼽힌다.


'메리'의 시점에서 죽은 남편의 숨겨진 가족 '쥬느'(나탈리 리차드)의 집을 찾아가고 그의 일상과 집안 곳곳을 의심과 호기심이 얼마간 섞인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을 <사랑 후의 두 여자>는 불과 90분의 짧은 상영시간 동안에도 세밀하게 공들여 관객에게 전한다. 기도를 하다가도 울음을 터뜨리고, '쥬느'의 집에 있는 남편의 흔적들을 보다 감정이 벅차오르는 순간들을 조안나 스캔런은 특유의 연기로 담고 있는데, 대사도 표정 변화도 없이 감정을 조절할 때와 어떤 순간에 이르러 직접 표현해야만 하는 순간을 이 1시간 반의 드라마에서도 완벽히 통달한 것처럼 보인다.


얼핏 이야기 구성은 그다지 새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면도 있다. '쥬느'의 집에 처음 찾아간 '메리'는 몇 번이고 "내가 아메드의 아내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습했지만 정작 이삿짐 정리에 한창인 '쥬느'에게 인력사무소에서 보낸 청소부로 오인받는다. 마침 '쥬느'와 남편의 관계를 비롯한 몇 가지에 대해 더 알고 싶었는지 '메리'는 오인받은 김에 진짜 청소부가 되기로 하고 며칠간 '쥬느'의 집을 드나든다. 보기엔 청소와 짐 정리를 대충 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쥬느'의 신뢰를 얻었는지 나중에는 아예 집 열쇠를 받고 자유롭게 왕래하기도 한다.


영화 '사랑 후의 두 여자'


그 과정에서 변수는 '쥬느'의 아들인 '솔로몬'이다. 이 변수를 풀어나가는 방식에는 언어가 있다. 프랑스어를 주로 쓰는 '쥬느', 영어를 쓰는 '메리', 그리고 그 둘 다를 쓰는 '솔로몬'까지. 여기에 한 가지 언어가 더 있다. 파키스탄과 인도 등지에서 쓰이는 공용어 중 하나인 우르두어. 세 사람이 식탁에 앉아 우르두어를 쓰는 지역의 요리인 사그, 그리고 와인을 사이에 두고 어떤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알림 칸 감독은 많은 대사를 쓰지 않고도 인물의 내면을 표정과 분위기, 관계만으로도 전달하는 데 일가견이 있어 보인다.


영화 '사랑 후의 두 여자'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라는 신철규의 시구처럼('눈물의 중력',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2017)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상실의 순간이 있다. 그것은 '메리'에게도, '쥬느'에게도, 그리고 '솔로몬'에게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사랑 후의 두 여자>는 무리하게 슬픔을 봉합하려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비슷한 종류의 감정을 겪는 중인 이들이 뜻하지 않게 동질감을 발견하거나 서로를 다독여줄 수 있음을 깨닫는 드라마다. '메리'만 '쥬느'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아니라 '쥬느' 역시 '메리'에게서 어떤 아픔을 느낀다.


짧은 상영시간 안에도, <사랑 후의 두 여자>는 서두에 언급한 해안 절벽이 무너지는 대목 외에도 기억해 둘 만한 장면을 여럿 가지고 있다. 예고편에서도 볼 수 있는, 해변에 누워 모든 걸 내려놓은 듯 파도를 맞는 '메리'의 모습이라든지, 카세트테이프나 비디오테이프 속 어떤 사랑과 행복의 순간들을 복기하는 '메리' 혹은 '쥬느'의 표정이라든지. 어떤 갈등이 해소되고 난 뒤, <사랑 후의 두 여자>의 엔딩은 인물로부터 카메라가 서서히 거리를 두고 거의 소실점까지 멀어지는 방식을 택한다. 인물이 아픔을 치유한 채 어디론가 향해가는 마무리가 아니라 그를 그 자리에 두고 영화가 스스로 자리를 뜨는 듯한 모습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일말의 낙관과 위로를 얻는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사랑 후의 두 여자'의 삶이 거기서 지속되고 있으리라는 것에서, 무너짐 뒤에도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 '사랑 후의 두 여자' 국내 포스터

<사랑 후의 두 여자>(After Love, 2020), 알림 칸 감독

2022년 3월 30일 (국내) 개봉, 90분, 15세 이상 관람가.


출연: 조안나 스캔런, 나탈리 리차드, 탈리드 아리스 등.


수입/배급: 판씨네마(주)


영화 '사랑 후의 두 여자' 스틸컷

*본 글은 판씨네마(주)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내용과 평가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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