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Apr 10. 2022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

4월 어느 주말의 기록

태풍이 발생하는 원인은 "지구가 자전을 반복하면서 생긴 열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기상청 사람들: 사내연애 잔혹사 편](2022)의 13화. 14호 태풍과 15호 태풍이 연이어 제주에 상륙하는 상황 속에서 예보팀은 태풍이 전남 남해안을 시작으로 한반도 전체를 관통한 뒤 포항으로 빠져나가는 시나리오, 동쪽으로 더 꺾여 남부 지방 일부에만 영향을 주는 시나리오, 북태평양 고기압의 수축으로 일본 규슈 쪽으로 전향하는 시나리오를 각각 상정한다.


긴박한 상황이 모두 지나고 난 뒤 하경(박민영)의 내레이션은 앞에서 말한 태풍의 발생 원인과 함께 이런 내용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 태풍이 당장은 우리를 힘들게 할지 모르나 길게 보면 결국 모두에게 유익한 존재라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을 잘 이겨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준비한 시나리오가 정확히 들어맞든 빗나가든 인생은 계속되고 우리는 또 다른 시나리오를, 혹은 그다음을 준비해야만 한다.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 사내연애 잔혹사 편'의 한 장면


감정을 들여다볼 시간도,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시간도 허락되지 않던 1분기가 지나고 조금의 여유를 찾았다. 낮 기온은 20도가 되었고 여느 때처럼 계절이 바뀔 무렵이다. 집 옆에는 철공소였던 건물이 허물어지고 오피스텔이 지어지고 있다. 또 달이 바뀌고 며칠이 지나, 어제는 지나간 감정들을 들여다보고 그걸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순간이 모처럼 있었다. 그때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후회하거나 불만족하지 않았을까.


기상청의 예보는 날씨의 흐름을 맞히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거라는 말이 드라마에 언급된다. 물론 삶에는 그런 예보가 주어지지 않고 관측하거나 측량하거나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꽃이 피고 볕이 좋은데 여전히 안갯속을 걷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조금 한다. 살아볼 거라 짐작하지 못했던 날들이 있어, 이제는 무언가 새로 시작하는 것이 주저스럽고도 어렵게 된다. 지금 가장 골몰해 있는 건, 어떤 상태를 지키는 일이다. 마음을 돌아볼 틈도 없이 야근과 원고와 여타의 할 일들에 묻혀서 몇 달을 보냈다. 봄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는 게 조금은 어리둥절하다. (2022.04.09.)


@카페 '라이블리'에서


*글의 제목은 최지은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에서. (창비, 2021)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매거진의 이전글 친애하는 낯선 음악들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