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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pr 30. 2022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존 윌리엄스 소설 『스토너』(1965)를 읽고

방배동 '책그리고'에서


줄리언 반스가 2013년 『가디언』지에 기고한 글 [Stoner; the must-read novel of 2013]에는 존 윌리엄스가 자신의 에이전트 마리 로델에게 1963년 보낸 서신이 일부 인용된다. 『스토너』의 출간을 2년 앞둔 그때, 그는 『스토너』에 관해 이렇게 썼다. “베스트셀러나 그 어떤 것도 될 것이라는 환상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오직 확신하는 것은 이것이 좋은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아주 좋은 소설이 될지도 모릅니다.”

『스토너』 로부터 7년 뒤, 존 윌리엄스의 『아우구스투스』는 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했지만 그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후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다. 1994년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는 그에 대해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교육자”였다고 소개했다. 그는 덴버 대학교에서 문학과 문예창작을 30년 동안 가르쳤다.

줄리언 반스의 글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소설가는 종종 두려움에 대해 쓰지만 시간을 향한 신뢰에 대해 쓰기도 한다. 세월은 끝내 그의 겸손한 희망을 입증했다. 존 윌리엄스가 에이전트에게 서신을 보낸 지 50년 뒤 『스토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반스에 따르면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가 흔한 ‘Academic Novel’로 분류되기를 바라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도살자의 건널목』(1960) 또한 단지 ‘Western’으로 분류되기 원치 않았다. 그렇지만 반스는 『스토너』를 아주 좋은 ‘academic novel’로, 『도살자의 건널목』을 아주 좋은 ‘western’으로 평한다. 여기서 그가 쓴 ‘very good’의 의미는 하나의 장르나 축약으로 단순화될 작품이 아니라는 뜻에서인 듯하다.(“The novels slip their identifying tag.”) 삶이 요약될 수 없는 것처럼, 그 삶이 써낸 서사도 그렇다.



“이제 마흔두 살인 그의 앞날에는 즐겁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아도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

-존 윌리엄스, 『스토너』, 알에이치코리아, 김승욱 옮김, 2015, 254쪽


스토너의 삶에는 분명 좋은 일들이 여럿 일어나지만 그것들은 기대만큼의 실망을 반드시 동반한다. 정교수가 되지 못하고, 결혼 한 달 만에 그것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딸과의 친밀함을 유지하지 못하며, 학문이 그렇듯 사랑 또한 외부로부터 다치고 깨어지기 쉬운 것임을 확인한다. 전쟁으로 학생들과 교수들이 죽어가는 것을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목격했고, 부모는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을 법한 보잘것없는 삶을 살다 죽었다. 죽는 순간에는 단지 자신이 썼던 책을 가까스로 펼치며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최후를 감각한다.


존 윌리엄스 소설 '스토너' 초판본 표지(예스24)


존 윌리엄스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하기로 원한 것을 평생에 걸쳐서 했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감각과 성찰을 갖고 있었으며 직업에 대한 신념도 있었다. 그가 읽고 쓰는 일을 계속하고 그것에 관해 생각하고 탐구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가 대학에서 영문학에 눈을 뜨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윌리엄 스토너는 학자가 아닌 삶을 상상할 수 없을 것으로 믿어지는 길을 끝내 걸었으므로, 영문학이 아닌 어떤 것에 대한 가정은 할 수 없다. 그가 2학년 때 아처 슬론의 영문학 수업에서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처음 접했던 그때, 보이지 않았고 어쩌면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그는 소설의 경계를 넘어 수십 년 뒤의 독자에게 알 수 없는 위로를 주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틀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107쪽)

“그는 자신의 소망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그를 슬프게 했다.”
(133쪽)


인생에서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 운명적 사랑과 직업적 성공이 자신의 것이 되리라는 낙관. 이들은 종종 그것을 품는 이의 마음을 배반한다. 악한 이들이 승승장구하고, 수고가 인정받지 못하며,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윌리엄 스토너의 삶을 실패한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문학 작품에서 만나리라고 어쩌면 가장 기대하기 어려울 종류의, 누군가는 볼품없다 할 이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는 건 마치 수십 년 뒤의 어떤 이의 불안을 예감한 것처럼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지고 인내하려 하며 스스로 옳다고 믿는 가치를 굽히지 않고 내내 성실했기 때문이겠다.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 순간에 불과”하다고 해도(9쪽), 스스로의 안에서 그 순간은 영원이 될지도 모른다.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결국은 어딘가에 도착하고야 말 일생의 여정 내내, 어떤 이야기는 마치 이정표처럼 기억해 둘 만큼 하나의 태도가 된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낮은 위치에서도 스스로의 작은 기쁨과 위안을 터득하며, ‘소네트’가 울림으로 다가왔던 경이의 순간을 기억하고 그것을 실현하기를 평생 추구하거나 혹은 잃지 않는 것.



“그는 녹초가 될 때까지 즐겁게 온몸을 바쳐 일하면서 이 시절이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과거나 미래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실망이나 기쁨도 마찬가지였다.”
(351쪽)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원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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