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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05. 2022

알 수 없는 방식의 연결감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달리기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이 기록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4월의 마지막 금요일. 교외로 나와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들으려는데 수신이 원활하지 않아 대신 블루투스로 연결된 휴대전화로 음악을 재생했다. 주파수가 제대로 맞아야 하는 라디오와 달리 근거리에 있기만 하면 되는 연결 상태로 듣는 음악은 또렷했다. 이따금 터널을 지나거나 할 때의 외부 소음이 영향을 줄 뿐이었다. 한적한 풍경을 곁에 두고 숯불에 고기를 굽는 저녁에도 블루투스로 듣는 음악이 있었다. 회사에서 중요한 일 하나를 마치고 떠난 팀 워크숍에서의 몇몇 장면을 떠올리다, 김애란의 산문에서 읽은 다음 대목을 생각했다.


“세계는 만날 줄 몰랐고 만날 리 없는 것들이 만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다 했던가. 2006년에 쓰고, 2007년에 묶은 소설을, 2012년 봄 누군가가 녹음한 파일로 듣고 있자니 어쩐지 오래전 멀리 부치고 잊어버린 편지를 돌려받는 기분이었다. 내가 나로부터 답장을 받은 느낌. 그런데 그 외 나머지 말, 나머지 기억, 나머지 내 봄, 내 어둠, 당신의 계절은 모두 어디 갔을까. 어쩌면 그것들은 영영 사라진 게 아니라 라디오 전파처럼 에너지 형태로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다 드물게 주파수가 맞는 누군가의 가슴에 무사히 안착하고, 어긋나고, 보다 많은 경우 버려지고, 어느 때는 이렇게 최초 송출지로 돌아와 보낸 이의 이름을 다시 묻는 건지도.”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열림원, 2019, 43쪽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는 하는 어떤 연결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으로 인해 가능하게 되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로부터 얼마만큼의 시간을 지나거나 돌아온 것일지, 처음은 어디였을지.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이나 ‘우주의 기운이 모인’ 것 따위의 일이 아니라 여기에는 정말로 ‘알 수 없는’ 거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신기함이 자리한다. 예를 들면 어떤 작가를 좋아하거나 어떤 아티스트를 좋아해서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 아니면 특정한 장소에 자주 걸음 하는 경우나 특정한 시간의 규칙을 지키는 일 같은 것도 있다.



최근에 특히 그런 순간들을 자주 만났다. 어떤 모임에서는 ‘인스타 팔로우하고 있어요’라며 나를 안다는 이의 말을 만났고, 어느 오픈 채팅방에서는 내가 아는 누군가를 안다는 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것들은 그저 운에 불과할까? 그럴 때는 자주 어리둥절해지거나 다음 말을 더 신경 써서 고르게 된다. 아, 또 얼마 전에는 회사 앞에 커피를 사러 나갔다 누굴 만나기도 했었지. “그때 그렇게 거기서 마주칠 일”인 것이냐고 했다. 온통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것들만이 도처에 있으니 그들 가운데서도 이런 우연한 일들은 기억에 남는다.


이런 기억들도 결국은 옅어지기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잊고 지내게 되는 시간, 장소,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함께였지만 어느 틈엔가 멀어지거나 잊히게 된. 인스타그램의 기능 중 ‘내 활동’을 검토하는 것이 있다.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남기거나 한 그 흔적들은 최신순이 아니라 ‘오래된 순’으로도 볼 수 있다. 몇 년 전의 댓글을 읽거나 하면 자주 과거의 이름들을 만난다.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얼굴을 어디선가 우연처럼 대면하고는 잠시 미소를 짓거나 멋쩍은 인사를 하는 일을 상상해본 적이 있다. 그런 것도 하나의 연결일 수 있을까 하면서.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난 적이 없지 않다. 어떤 영화에 대해 열심히 반복해서 기록해둔 일이 십수 년 만의 만남을 가능하게도 했고 어느 소설가의 북토크에 갔다가 시작되고 지속된 인연도 있다.


그런 것들을 가능케 한 주파수는 억지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지금 살고 있는 방식대로’ 살기에 있었다. 언젠가 몇 차례 이야기한 ‘삶을 핍진하게 만드는 일’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빈번한 우연함을 만들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는 게 있을까?




며칠 전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자주는 아니어도 일정한 빈도와 횟수, 발이 나아가는 거리에 대한 감각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대부분의 경우 이유라기보다는 핑계에 가까웠을) 일들로 그 몇십 분의 시간을 허락하는 일도 어려웠다. 달리지 않다 보니 확실히 전보다 적게 달려도 숨이 차고, 마스크를 잠시 벗어도 여전히 쓰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걸 발견한다. 더 오래 달려도 가뿐해지게 되려면 다시 얼마간의 반복이 필요할 것이다. 뛰는 일 하나로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닐 테지만 결국에는 ‘뛰는 근육’이 생기고 고요해진 시간대의 그 풍경들이 더 익숙해질 것이다. 그래서 다시 전처럼 짧은 거리부터 시작해 달린 거리를 늘려가고 있다.


매사에 보기보다 규칙적으로 사는 편은 아니었다. 닥쳐오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미뤄두는 것도 많고 효율과 계산보다는 무식하게 부딪혀 봐야만 무엇이든 제대로 하게 되었던 일도 많이 있다. 영단어로 ‘루틴’이라고 하는 것들이 매일 있는 것은 아니었고 스스로는 여전히 게으르고 규칙보다는 ‘되는 대로’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편이다. ‘해야지’ 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일들 몇 가지를 그래서 떠올려보는 중이다. 더 많은 연결감과 우연의 발견 같은 것을 위해서라고 우선 적어본다. 글 쓰듯이 지속하는 삶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2022.05.05.)



*gaga77page '마음 쓰이는 영화의 시간' 모집 중: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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