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열정'(2008) 리뷰
"나와 스피드를 맞춰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가호와 도모야의 대화
'우리'는 자주 어긋나고 엇갈린다. 그로 인해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겨나고 어떤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아지거나 그 존재가 발견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근작 중 하나인 <아사코>(2019)의 리뷰를 적으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썼다. "(...) 요동치는 마음속에서 ‘아사코’는 그러나, 기꺼이 자신에게 찾아온 모든 일을, 누군가의 선택으로 자신이 입은 상처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누군가가 입은 상처를 모두 부정하지 않기로 한다." 최근 국내 개봉을 앞둔 그의 장편 데뷔작 <열정>(2008)에 관해서도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선택을 유예하거나 회피했던 이들이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 일에 대해 직시하고 마침내 어떤 결정을 하기로 선택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이야기라고.
<드라이브 마이 카>(2021)를 보면서 감탄했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온전히 절제되고 통제된 듯 보이는 환경 속에서도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스토리텔러가 끝내 만들어내는 공기가 얼마나 생생한가 하는 대목에 있었다. 대사로 직접 발화되는 영화 언어가 꼭 게으른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침묵과 여백을 이야기에 허락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삶을 겪어내고 딛고 나아가는 일들에 대하여 179분 내내 체험시키던 <드라이브 마이 카>의 잔영이 채 가시지 않은 채로 만난 그의 14년 전 영화인 <열정>을 만났다.
임신한 아내가 있으면서 다른 여성에게 욕망을 드러내거나 결혼을 앞두고 다른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등, <열정>의 인물들은 대부분 관객 입장에서 쉬이 공감하거나 동정하거나 이입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도모야'와의 결혼을 앞둔 '가호'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복잡하게 얽히고 교차하는 관계 속에서 호감을 갖기 어려운 위치를 고수한다. 이 관계들이 말해주는 것은? 도덕관이나 윤리관을 벗어난 인물들이 갖는 부조리함이나 부도덕함을 심판하려고? 그것보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주목한 점은, "인간의 욕망 자체는 원래 그렇다"는 쪽에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더 중요해지는 것은 그것들 사이에서 혹은 그것들 안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
영화의 발단이 되는 일은 6명 혹은 7명의 절친들 사이에서 '가호'와 '도모야'가 10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앞둔 것이다. '가호'의 생일을 축하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어쩐지 저마다의 사연을 내포한 듯 복잡하다. 이유는? 우선 '가호'에게 호감을 가진 이가 '도모야' 말고도 있다. 두 사람은 오래 연애했지만 거의 "어쩌다 보니" 결혼하게 되었다는 투로 말한다. '가호'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겐이치로'가 정작 만나고 있는 건 또 다른 친구인 '다카코'다. <열정>의 인물관계도는 이런 식으로 얽힌다. 그럼, 제목인 '열정'은 뭘 내포하는 것일지. 여기에 어쩌면 이 영화의 이정표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열정>의 중반까지는 얼핏 도덕적이지도 순수하지도 못한 인물들이 벌이는 소동극에서 인간의 추악한 속성을 이끌어내는 드라마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목적은 그들을 풍자하거나 조롱하거나 해부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자체로 인간 본연의 것으로 끌어안으려 하는 데 있다. (중반에 언급되는 '죽은 외할아버지가 되살아났던 에피소드'에서 그 생각을 하게 된다.) 추악하니까 배척하거나 교정해야 한다기보다 그것마저도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에 있어 빠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거기서 더 나은 선택이나 개선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한 번 더 고민해보는 일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아사코>에서도 마치 재난(대지진)이 일어나기 전으로 삶을 "되돌릴 수 없을 거야"라는 발화가 등장하듯 <열정>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각 캐릭터들의 관계와 그들 사이의 (글자 그대로) '진실게임'을 통해 밝혀지거나 언급되는 사랑 혹은 그것임을 가장한 맨얼굴들은 인물들로 하여금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면을 상대로부터 보게 만들거나 그동안 스스로 외면해왔던 내면의 물음에 답을 하게 만든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선택이다. 비 온 뒤 탁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도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여기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심경의 변화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찾아왔음을 깨닫게 될 때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혹은 받아들이기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열정'이라는 영화의 제목에 대한 일종의 현답이다. 내면의 온도를 직시하는 것.
<열정>의 초중반은 여러 명이 모인 자리에서조차 의도적으로 극도의 클로즈업 숏이 쓰이는 등 관객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거나 긴장시키기로 작정한 것처럼 짜여 있다. 이는 인물들을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거나 혹은 그 인물들에게 이입하지 않고 거리를 두게 만든다.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이 소위 '비호감'일 때 그 영화를 제대로 따라가기 어렵다. 주로 아파트 실내에서 펼쳐지는 이 며칠간의 여러 군상들의 대화를 지나면 비로소 이 여정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대하여 수긍하게 된다. 최근작인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운전석에 앉은 '미사키'는 '가후쿠'와 '다카츠키'의 뒷좌석 대화를 듣더니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네요"라고 평가한다. 관계 속에서 일말의 진실을 찾는 과정은 감독이자 각본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세계 전반에 걸쳐서 계속되고 있다.
<열정>(Passion, 2008),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115분, 국내 개봉 시기 및 관람등급 미정.
출연: 카와이 아오바, 오카베 나오, 오카모토 류타, 시부카와 키요히코, 우라베 후사코 등.
수입: (주)영화사조아, (주)트리플픽쳐스
배급: (주)트리플픽쳐스
(2022.04.23. 메가박스 코엑스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