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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08. 2022

넘어지기 전부터 미리 넘어질 걱정은 하지 말자고

 영화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2020) 리뷰

*본 글은 판씨네마(주)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내용과 평가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어느 날엔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나'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


말을 하기 전에 그 개요와 다음에 이어질 말 따위를 몇 가지 생각해두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자 천성이기도 했다. 상대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어떡할지, 썰렁해지거나 정적이 흐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만약을 가정하는 것도 그렇고, 의도하고 예상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으면 당황하고 식은땀이 나는 것도. 영화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2020)의 주인공 '아드리앵'(벤자민 라베른헤)의 모습을 보면서, "항상 내 세계에 갇혀 있고 산만하며 머릿속에서 딴생각을 하던 아이였다"라며 스스로에 대해 고백한 로랑 티라르 감독의 인터뷰를 보며, 어쩐지 낯설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애인이 잠시 시간 좀 갖자며 관계의 휴식을 선언한 지 38일째, 잘 지내냐는 문자를 보냈고 상대가 그것을 읽었지만 '아드리앵'은 답장을 받지 못해 전전긍긍해 있다. (소위 '읽씹'과 '안읽씹'의 차이가 있겠지만 어떤 경우든 상대가 답장을 하지 않는 상황은 초조함을 줄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웃으며 일상적인 농담을 주고받지만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는 가족과의 저녁식사 중에도 애인 '소니아'(사라 지로도)의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아드리앵'에게, 결혼을 앞둔 누나가 축사를 부탁한다. 안 그래도 자신이 '소니아'에게 했던 말들과 그에 대한 반응,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여러 상황들을 복기하고 있던 '아드리앵'에게 그 순간 부담스러운 숙제가 하나 늘어난다. 자신의 재미없는 농담으로 싸한 분위기가 되는 결혼식장 모습을 떠올리고, 어떻게 하면 축사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상상하다 누나와 예비 매형이 결혼식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가정까지 하는 '아드리앵'은, 영화 내내 관객에게 말을 건다.


영화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 스틸컷

"나만 그런가요?"라며 말을 거는 주인공 '아드리앵'


보이지 않는 벽을 깨고 영화 속 인물이 관객을 향해 (카메라 정면을 응시하며) 말을 하는 것은 대체로 거리감, 즉 체험하듯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관객 자신이 '영화'를 보고 있음을 느끼게 만든다. 캐릭터에 이입하는 게 아니라 멀찍이 간격을 두고 그의 행동을 관찰하게 만드는 일. 그래서 이를테면 <데드풀>(2016)에서처럼 유머러스한 효과를 만들면서 캐릭터의 독특한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데 적합하다.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에서도 이 '방백'의 활용은 영화가 코미디에 중점을 둔 만큼 비슷한 효과가 있는데, 상술한 이유로 이 영화의 '아드리앵'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은 프랑스 소설가 파브라스 카로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감독에 따르면 원작의 독자들 사이에서도 "주인공이 짜증 난다"라는 부류의 반응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각색의 방향은 자연히 그 특색을 살리면서도 관객이 상영시간 동안 캐릭터를 지켜보는 일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책은 읽다가 언제든지 덮을 수 있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고 한 호흡으로 보는 것'이 핵심인 매체이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 내내 '아드리앵'은 매형이 각종 지식들을 꺼내며 잘난 체 하거나 아빠가 수십 번도 들었던 자기 어릴 적 이야기를 꺼내거나 할 때마다 그 자리가 지루하다는 듯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건다. 스스로의 회상에 따른 고교 때의 행동(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집착적으로 볼펜을 선물하는 일)이나 자신이 상상하는 결혼식 축사에서의 이야기 등은 소위 짜증을 유발할 수 있을 만큼 '비호감' 주인공이 되기 쉽지만, 빈번한 독백은 오히려 '아드리앵'을 불쌍하게 보이게 만들기도 하고 영화의 흐름을 잠시 '휴식'하며 '아드리앵'의 내면을 엿보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그럴 수 없지만 관객은 그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방백을 하느라 가족들과의 '실제' 대화 흐름을 잠시 놓치기도 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포인트다.)


영화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 스틸컷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


'소니아'로 인한 것이긴 했지만,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의 주인공 '아드리앵'이 느끼는 강박에는 이런 것도 있다. 공원 벤치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 길 한편에서 아이에게 스스로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치는 엄마가 있다. 아이와 조금 거리를 둔 채 자기가 있는 곳까지 혼자 힘으로 와보라며 손짓을 하는 엄마와 긴장한 표정의 아이를 번갈아 보며 '소니아'는 "쟤가 중간에 넘어지면 우리 관계는 영원할 거야"라고 한다. 가벼운 농담이겠지. 무슨 그런 말을 하냐는 표정이었던 '아드리앵'은 어느새 '소니아'를 따라 '아이가 넘어지길' 응원하는 표정이 된다. 코끼리 생각을 절대 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 생각만 하게 되는 것처럼, 어느 고목에 붙은 수많은 연인들의 소원 쪽지들을 펼쳐 보면서 '아드리앵'은 언제나 특정한 상황이나 우연, 혹은 사소한 대화의 내용 하나까지 그 전후의 영향 같은 것을 염두한다.


마치 마크 웹의 <500일의 썸머>(2009)에서 '썸머'가 결혼할 상대를 만나게 된 계기가 '식당에서 도리안 그레이의 작품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 특정한 일은 훗날 어떤 것의 발단이 되기도 한다. '아드리앵'은 내내 그런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누나가 직접 만든 디저트를 먹고 매형이 혹평을 했는데 누나의 얼굴이 차갑게 굳는다. 이때 옆에 있던 자신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다면? 그는 '디저트 사건'으로 누나와 매형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을 넘어 이별하게 되는 일을 상상한다. 상상에서 돌아온 '아드리앵'은 자기 입맛에는 최고라며 밀가루 반죽에 대한 매형의 코멘트를 반박하고, 매형은 그러자 자기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며, 최고의 케이크라며 더 달라고 한다.


저녁 식사 중 '아드리앵'은 가족의 전통과도 같은 엄마의 디저트를 떠올리며 그것이 식탁에 등장할 때까지 '소니아'의 답장이 오지 않으면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수십 년을 익숙하게 먹었던 엄마의 케이크 대신 누나가 직접 준비한 다른 케이트가 등장하고, 이것도 '아드리앵'에게는 '짐작과는 다른 일들'의 연속이다. 그는 '완벽한 축사'를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축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결혼식을 망치는 상상보다는 좋은 내용의 센스 있는 축사로 현장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상상을 하는 게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영화를 보는 내내 '아드리앵'의 저 고민들을 공감하게 되는 면이 분명 있다.


영화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 스틸컷

넘어지기 전부터 미리 넘어질 걱정은 하지 말자고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의 87분이라는 짧은 상영시간 중에서도, 영화 속에서 실제로 흘러가는 시간은 '아드리앵'의 플래시백과 방백을 제외한다면 실질적으로 넉넉히 잡아도 불과 몇 시간이다. 한번의 저녁식사와 한번의 축사. 밥 먹는 일도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는데 두 사람과 두 가정이 만나는 결혼식이 짐작한 대로 흘러갈 리가 있을까. 관계에 소심하고 연애에 서투른 주인공 '아드리앵'이 쏟아내는 '벌어지지 않은' 시나리오들 중 실제로 일어날 것은 결국 하나일 것이고 그중 어떤 것들은 무수히 반복된다. '소니아'와 '아드리앵'이 공원에서 보았던 그 아이는 앞으로도 여러 번 넘어지고 다칠 것이다. 인생도 보조 바퀴가 없는 자전거와 다르지 않아서, '아드리앵'에게도 그리고 결혼을 앞둔 그의 누나와 매형에게도 좋을 날들만 있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거기 사랑이 있다면. 사랑을 찾기를 그 사랑을 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넘어지는 것쯤은 별 일 아니라고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아닌 것 같아서' 혹은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목 안쪽까지 올라왔다가 차마 입밖으로는 발화하지 못했던 말들이 누구에게나 몇 개 있을 것이다. "잘 지내"냐는 문자 한 단어도 쓰고 지우기를 거듭해 본 적 있겠다. 그런 마음은 전적으로 더 잘 표현하고 싶고 더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은 뜻에서 비롯한다. <결혼하고도 싱글로 남는 법>(2006), <꼬마 니콜라>(2009), <꼬마 니콜라의 여름방학>(2014), <업 포 러브>(2016) 등 유쾌하고도 가족적인 영화들로 필모그래피를 채워온 로랑 티라르 감독은 분명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는 필름메이커로 여겨진다. 완벽하지 않기에 실수하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넘어져 본 만큼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겠고 실수처럼 보이는 것도 지나고 보면 꼭 필요했을 경험으로 남을지 모른다. 그러니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의 '아드리앵'은 영화의 경계를 넘어 관객들에게도 이렇게 말해주는 게 아닐까. 아직 넘어지지 않았는데 미리부터 넘어질 걱정을 하느라 페달을 밟길 멈춰선 안 되겠다고.



영화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 국내 포스터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Le discours, 2020), 로랑 티라르 감독

2022년 5월 19일 (국내) 개봉, 87분, 15세 이상 관람가.


출연: 벤자민 라베른헤, 사라 지로도, 줄리아 피아톤, 키안 코잔디, 프랑수아 모렐, 구일라인 론데즈 등.


수입/배급: 판씨네마(주)


영화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 스틸컷

*2020년 제73회 칸국제영화제, 2021년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본 글은 판씨네마(주)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내용과 평가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gaga77page '마음 쓰이는 영화의 시간' 모집 중(링크)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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