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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29. 2022

미풍이 불던 어느 여름의 감각

영화 '톰보이'(2011) 리뷰

“어릴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처음 경험한다. 욕구가 강하고 감각적인 시기다. 나이가 들면 선택을 해야 하지만 이때는 오히려 모든 것이 열려 있고 정체성을 갖고 놀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캐릭터들이 가져다주는 내러티브와 영화의 관점을 좋아한다.”

-셀린 시아마 감독, <Popmatters>와의 인터뷰 중에서



일단 <톰보이>(2011)를 초록의 영화라고 말해볼까. 영화 첫 장면은 가족과 함께 낯선 동네로 이사 온 ‘로레’(조 허란)가 차 안에서 차창을 열고 선 채 바람을 맞는 뒷모습이다. 나는 이것을 계절을 온 몸으로 만끽하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다. 의상 등으로 미루어 일단 계절적 배경은 여름으로 보이는데 그것 역시도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느껴졌다. 무엇인가가 시작되는 계절, 무엇인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피어나는 신록들.


‘로레’는 이웃에 사는 ‘리사’(진 디슨)를 만나는데 이때 자신을 ‘미카엘’이라 소개한다. 짧은 머리를 한 채, 영락없는 남자 아이. ‘리사’의 소개로 ‘로레’, 아니 ‘미카엘’은 동네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며 친해진다.


영화 '톰보이' 스틸컷


<톰보이>는 ‘로레’의 여동생 ‘잔’(말론 레바나)과 ‘로레’의 관계를 주의 깊게 보여준다. 함께 목욕을 하거나 머리를 만지는 등의 여러 행동들. 오직 아이들만의 시간을 영화가 바라보는 시선에는 가치 판단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니까 ‘로레’가 자신을 남자인 ‘미카엘’로 소개하고 남자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말하자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남자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인용한 셀린 시아마 감독의 말처럼 ‘갖고 놀’기 위해서인 것이다.


<톰보이>는 후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다. 82분에 불과한 상영시간 동안, <톰보이>는 판단하지 않는다. 클로즈업의 적극적인 활용에 힘입어 ‘로레’ 혹은 ‘미카엘’의 곁을 내내 지키며 관객도 영화 속 세계를 함께 경험하게끔 만드는 연출과 촬영 방식은 아역들이 주인공인 영화가 서사를 만드는 방식의 한 모범을 내보인다. 한국 영화로 말하자면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2015)나 <우리집>(2019) 같은 영화들이 해냈던 것들.


<우리들>에서 ‘윤’(강민준)이 하는 말이 하나 있다. “그럼 우리 언제 놀아?” 이건 꼭 <톰보이>에서 누군가 했을 법한 말이라 생각해도 어울린다. <톰보이>는 성 정체성과 같은 것들을 화두로 적극적으로 끄집어내거나 서사의 중요한 요소로 삼는 대신 열 살의 ‘로레/미카엘’ 본인의 시선에서 일종의 통과의례 혹은 호기심의 요소로 다룬다.


영화 '톰보이' 스틸컷


물론 사건은 일어난다. 어떤 일로 인해 ‘미카엘’이 남자 ‘미카엘’이 아니라 여자 ‘로레’임이 발각될 뻔한 일이 영화 초반 한 번 일어난 데 이어 중반에 이르러 정말로 발각된다. 엄마는 ‘로레’에게 치마를 입히고, 뺨을 때리고, 왜 그랬냐고 추궁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톰보이>는 예컨대 ‘로레’의 엄마가 ‘로레’ 친구 엄마를 찾아가서 하는 대화 내용 같은 것을 ‘로레’는 물론 관객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 ‘로레’의 눈높이와 마음높이에서 그 내용을 들어도 세세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가능하지만 주인공과 관객 사이 정보의 균형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경험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생동의 계절에, <톰보이>는 자라나는 아이들을 주된 얼굴들로 삼고, 그 가운데 더 성장하고 더 감각하는 주인공을 내내 따라가며 ‘성장’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Vogue>와의 인터뷰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은 “모든 것을 처음 경험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감정이 아주 강한, 감각적인 시기다. 하지만 일종의 금기가 있다. 우리 모두 같은 경험을 했지만 절대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어린이들은 호모섹슈얼리티 같은 카테고리를 필요로 하지 않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무언가를 경험한다.”라고도 말했다.


사회가 규정해놓은 것들로부터 어른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시기. 돌아올 수 없는 처음들로 가득했던 계절이 있다. <톰보이>는 내내 그것을 포착한다. 나이가 몇 살이든 성별이 무엇이든, 누군가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친해지고 싶어하고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만큼은 변치 않는 게 아닐는지. 엔딩 크레딧 부분에 나오는 노래에는 그래서 ‘널 사랑해 언제나’ 같은 가사들이 들린다.


영화 '톰보이' 스틸컷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고 맘속에선 미풍이 불던 우리의 여름. 창문 너머론 거대한 초록이 넘실거리고, 그 시절 대중에게 사랑받던 젊은이 둘이 '나 더 이상 무얼 바라겠니'라 노래하고 있었다. 대걸레와 빗자루를 든 그 애와 내 머리 위론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 같은 하얀 뭉게구름이 흘러갔고, 힙합 문법에 맞게 사회비판을 일삼던 두 가수는 그때만큼은 서정적인 멜로디에 몸을 맡긴 채 지금이 참 좋다고, 젊어서 참 기쁘다는 식의 가사를 읊고 있었다.”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에서, 열림원, 2019


영화 '톰보이' 국내 메인 포스터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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