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너무 긴 시간이 흘러버렸어'라고 자조해본 적 있을 누군가에게 여전히 펼쳐지지 않은 상상과 가능한 우연이 도처에 깔려 있다고, 그건 생각보다 괜찮을 것일지도 때로는 실수처럼 여겨졌는데 더 마음에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아직 그런 나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준다. 다시 한 번, 문을 열어둔 채로, 마법보다 불확실한 이야기가 거기 있으니 솔직하고도 용기 있게 맞이해보라고. 3부로 나뉘어 있는 영화 <우연과 상상>(2021)의 이야기를 제각기 혹은 서로 겹쳐 떠올리면서 생각하게 되는 건 살면서 선택한 것들과 선택할 수 있었으나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다. 그리고 적어도 한 번쯤 되뇌게 될 ‘만약’의 순간들도 있다. 거의 40여분씩 안배된 세 이야기는 회를 거듭하면서 점층적으로 구조를 완성해나간다.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가 실제에 끼어드는 상상
<우연과 상상>(2021)이 비슷한 시기 <드라이브 마이 카>(2021)를 연출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가 정말로 맞다고 말해주듯이, 영화의 1부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의 초반부에는 택시 뒷좌석에서의 두 사람의 긴 대화가 있다. ‘츠구미’는 친구 ‘메이코’에게 자신이 최근에 만나게 된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관객은 한동안 영화 바깥에 있는 정보, 즉 인물과 인물의 발화로만 제시되는 내용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 남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고 주로 듣거나 반응하는 쪽인 ‘메이코’의 표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지켜보게 된다. 1부를 끝까지 이끌어가게 만드는 동력의 상당 부분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그 세계 안에서 이미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었던 이야기가 된다. 이제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츠구미’가 만났다는 이가 과거 ‘메이코’와의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있었던 인물이라는 정보다. 인물 A와 B와 C가 있을 때 A와 B의 관계, B와 C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서로 다른 형태와 방식으로 (즉, 전자는 인물의 발화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습득, 후자는 영화의 시퀀스를 통해서 직접 습득) 접한 우리는 이제 조금씩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이제 A와 C는 어떻게 될까?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은 제목처럼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걸 한 번 믿어볼래?”라고 묻더니 정말로 일어난 일과 한 인물의 상상 속에서만 벌어진 일을 포개어놓는다. 여기서의 ‘마법’이란, 일어나지 않은 일이어도 얼마든지 상상을 통해 경험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만들어낸 이의 내면세계 자체가 아닐까.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문은 열어둔 채로」 - 고를 수 없는 다음 말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헤매고 어딘가에 도착하는 마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 한 사람은 불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이며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수업을 저학년 때 들었던 4학년 재학생이다. '세가와' 교수는 새 소설로 문학상을 받았고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오'는 책에 사인을 받으러 연구실에 방문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묘사를 담게 되셨나요?" 소설 속 한 대목이 특별히 마음에 들었다며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던 '나오'는 어느 순간 자신의 고민을 꺼낸다. 성적인 유혹에 약하다는 '나오'에게 '세가와'는 누군가의 앞에서 자신의 품위와 당당함을 잃지 말라고, 당신은 그럴 만한 사람이라고 격려한다. '나오'가 방문한 목적 혹은 배경은 다른 데 있었지만, 연구실의 문을 열어둔 채로 대화가 지속되는 「문은 열어둔 채로」의 이 에피소드는 '나오'의 개인적 영역을 넘어 스토리텔러가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방식 혹은 태도에 관한 화두로 확장된다. 모든 소설가가 '다음'을 완전히 구상한 채 그것을 쓰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대강의 개요 혹은 착상만을 가진 채 시작하여, 어느 순간 그것을 쓰길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끝을 만난다. 어디에 도착할지 모르는 상태로 지속되는 여정 속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단독자로서 주체적으로 거듭나는 연습을 하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응시한다.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다시 한 번」 - 말해주고 싶었으나 전할 수 없었던 이야기의 다른 해후
고등학교 동창회에 다녀오던 길에 '나츠코'는 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아야'를 만난다. 내려가던 이와 올라가던 이가 "위에서 만나!"라고 정한 뒤 정말로 조우하는 순간, 두 사람은 반가움과 신기함 속에 그간의 이야기를 더 나누기로 한다. 그 순간에는 알 수 없었겠지만, 알고 보면 이 이야기는 모르는 채로 순간의 우연을 따라간 일들로 가득하다. 먼저 '아야'는 '나츠코'를 카페 등에서 만나는 대신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데 그건 집에 마침 아무도 없었고 오후에 도착할 택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택배는 정확히 몇 시에 도달할지 모른다) 진짜 이야기는 그다음부터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은 채로 '학급에 이런 애(그의 언급에 따르면 '보이시한 친구')가 있었지' 정도의 단서를 따라왔던 '아야'의 "사실 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라는 말이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두 사람은 상대가 서로가 찾던 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나츠코' 역시 자기 눈앞에 있는 이가 자신이 찾던 것과 다른 이름을 가진 인물임을 확인한다. (일본의 여성들은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지만, 「다시 한 번」에는 한 가지 사정이 더 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찾고 있었거나 눈앞의 상대가 그 사람일 거라 짐작했던 '그'에게 전할 말 혹은 그에 대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이 대화가 지속될 수 있었는데, 서로가 서로에 대해 확인하는 과정 (예: 동창회에 누구를 만나러 온 것인지, "지금 행복한지", 그리고 가족 구성원에 대한 정보 등) 속에서 어쩌면 대화와 만남은 지속될 이유를 잃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한창 누군가와 이야길 나누고 있었는데 그게 내가 상상 혹은 짐작한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다면?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세 이야기 중 마지막에 배치된 덕분에, 혹은 이 이야기는 꼭 마지막이어야만 했던 것처럼, <우연과 상상> 속 3화 「다시 한 번」은 앞선 두 단편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구조 속에서 영화의 주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주인공의 행동과 내면을 들여다본다. '다시 한 번'이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를 그래서 생각한다. 1화에서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가 상상했으나 벌어지지 않은 이야기. 2화에서 '나오'(모리 카츠키)가 생각했을지도 모를, 그 이메일 주소를 제대로 적어냈다면 달라졌을 현재. 그리고 3화에서 이것은 상상에 그치지 않고 '재현'의 방식을 통해 다시 이야기가 된다.
(<우연과 상상>의 3화 「다시 한 번」의 중요 내용이 언급됩니다.)
'나츠코'(우라베 후사코)와 '아야'(카와이 아오바)는 고등학교 동창이 아니었다. '모카 나츠코'가 '유키 마카'라고 생각했던 그는 '코바야시 아야'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고, '나츠코'는 '아야'가 고등학교 때 함께 피아노를 치며 마음을 터놓고 고민을 나누던 친구와 '닮은' 사람이었다.
앞에서 "사실 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라는 말에서 흐름이 달라졌듯 "나를 누구로 착각했던 거야?"라는 물음을 통해서 흐름은 다시 달라진다. 두 사람이 서로 어디선가 만날 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 대해 착각하거나 오해하거나 다른 짐작을 하는 일은 가능하고,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 다른 한 사람 또한 같은 일을 행하는 일이라면 이건 상상에서나 가능했을지 모를 우연에 가깝다. 지금 '나츠코'와 '아야' 두 사람은 바로 그런 상상의 우연을 체험하는 중이었고 중간중간 ('아야'의 아들이 귀가한다든지, 택배 기사의 물건이 도달한다든지 하는 일들로) 개입하는 외부 요인들 속에서도 두 사람은 이 이상한 방식으로 시작된 이야기에서 나름의 의미를 서로 부여한다. '아야'는 '나츠코'가 착각했던 사람이 되고, '나츠코' 또한 '아야'가 짐작했던 그 '보이시한 애'가 된 채 일종의 역할극, <드라이브 마이 카> 식으로 말하면 '극중극'을 만드는 것이다.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우편과 전보의 시절로 돌아간 '제론'의 세계에서, 이렇게 수신인이 아닌 이에게 자기 이야기를 대신 꺼내는 일은 그 자체로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써 내려가는 일과 닮았다. 합의된 역할극을 통해 '나츠코'는 당신이 내 유일한 사랑이었다며, 당신을 통해 우리 삶에는 채울 수 없는 구멍과 필연적인 고통이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센다이 역 앞에서의 또 다른 장면에서 '아야'는 당신이 내게 다가와줘서 고마웠다며, 그건 유일한 빛이나 다름없었다며 그 우정이 어떤 의미였는지 털어놓는다.
'아야'가 떠올린 그 친구의 이름은 희망을 뜻하는 '노조미'였다. 성을 기억하지 못한 건 이야기의 여지를 남겨두는 일과 닮았다. 살면서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이는 일에 둔감해지거나 가능성보다 안정을 택하는 일에 익숙해지게 된다. 미지의 경험을 추구하는 일보다는 일상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 더 소중해진다. 한편으로 그건 우리가 평생 불확실함을 끌어안고 살기 때문이겠다.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으며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나날을 보냈을 유년을 지나, 하고 싶은 것과 원하는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일들에 익숙해지는 중년을 맞이한다.
이 이야기는 서두에 인용한 "뭐든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너무 긴 시간이 흘러버렸어"라는 대사 한 대목 덕분에 시작됐다. <우연과 상상>의 「다시 한 번」 속 '나츠코'와 '아야'가 나누는 포옹은 살면서 어떤 가능성을 포기한 적 있을, 만날 수 없는 누군가에게 마음속으로 오래도록 편지를 적어보았을 이들에게 전해주는 담담한 응원과도 같았다.
영화 '우연과 상상' 국내 메인 포스터 <우연과 상상>(偶然と想像, 2021),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2022년 5월 4일 (국내) 개봉, 121분, 15세 이상 관람가.
출연: 후루카와 코토네, 현리, 나카지마 아유무, 모리 카츠키, 시부카와 키요히코, 카이 쇼우마, 우라베 후사코, 카와이 아오바 등.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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