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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ug 14. 2022

우리는 우연하게도 매일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2013) 리뷰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전은경 옮김, 들녘, 2014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2013)는 한 사람의 여정이자 크게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시작은 사소하지만 우연했고, 우연했지만 알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스위스 베른에서 고전문헌학 강의를 하는 ‘라이문트’(제레미 아이언스)는 비 오는 어느 출근길에서, 강 위를 지나는 다리에서 물에 뛰어들려는 듯 보이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곧장 달려가 막는다. 다른 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보였던 어떤 하루. 그 낯선 사람은 붉은 코트 한 벌과 코트 주머니 속의 책 한 권만을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가 남기고 간 건 옷과 책만이 아니었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스틸컷


숙명은 떨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내 영혼은 숙명에 홀렸다
루시타니아의 고된 숙명에
       Bye.

-황인숙, ‘파두 -Dear Johnny' 부분,
『리스본行 야간열차』에서, 문학과지성사, 2007


많은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만드는 인물은 극의 전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조금 다르다. 좀 더 정확히는, 옷과 책을 남기고 간 사람보다는 그 사람이 남긴 물건 자체가 좀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코트 주머니에 있던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제목의 책 면지에는 어느 서점 도장이 찍혀 있었고 ‘라이문트’는 서점을 찾는다. 서점 주인 역시 책을 산 사람이자 ‘라이문트’가 다리에서 구한 그를 기억하고 있었고, 마침 책 안에는 리스본으로 가는 기차표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출발 시간이 15분밖에 남지 않은. 강의를 하다 말고 홀리듯 책 주인을 찾아 여기까지 온 ‘라이문트’는 짐도 없이 책 한 권과 책 주인이 두고 간 코트만 들고 곧장 그 기차를 탄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어쩌면 결정적인 순간이, 꼭 요란하거나 대단한 사건에만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상이나 지극한 우연에서 비롯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로 다가온다. 말은 책이 한다. ‘라이문트’와 『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 ‘아마데우’(잭 휴스턴) 사이에는 책을 통해서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채 이야기가 오간다. 영화는 기차 안에서 이끌린 듯 책장을 넘기는 ‘라이문트’의 모습에서, ‘라이문트’의 목소리(내레이션)로, 이후 ‘아마데우’가 과거 책을 쓰는 모습과 ‘아마데우’의 목소리로, 작가와 화자와 독자를 오간다. 다시 ‘라이문트’의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던 영화는 곧장 언젠가의 ‘아마데우’의 뒷모습을 포착하기도 한다. 우리는 책을 통해 단지 책 속의 내용을 혼자 소화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책에 담긴 작가의 생각과 마음을, 책 너머의 작가의 삶을 읽는다. 책은 곧 독자와 저자의 대화다. 리스본에 도착한 후 호텔로 향한 ‘라이문트’. 책의 주인을 찾아서 왔다고 하자 방을 안내해준 호텔 주인이 한마디 거든다. “책이 여행을 했네요.” 정말로 ‘라이문트’ 혼자가 아니라 책과 함께 떠나온 여정이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스틸컷


‘아마데우’가 남긴 책 속의 내용들은 마침 영화가 바라보는 삶에 대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여행의 주체인 ‘라이문트’가 경험하는 일련의 과정 역시 그것을 따른다. 우연은 계속된다. 우연히 길에서 자전거와 부딪힌 ‘라이문트’의 안경 한쪽 렌즈가 깨지는데, 안경을 새로 맞추어야만 했던 ‘라이문트’에게 우연이 한 번 더 찾아온다. 알고 보니 안경사의 삼촌은 ‘아마데우’를 아는 인물이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이야기는 그렇게 필연적이지 않아 보이는 일들이 불쑥 개입해 꼬리를 물며 계속된다. ‘아마데우’가 과거 한 어떤 행동 역시 마치 운명의 소용돌이처럼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우리는 우리의 일부를 남기고 떠난다. ‘공간’을 떠날 뿐이다. 떠나더라도 우린 그곳에 남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야만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우리 안에 남는다.'

-영화 속 아마데우의 책 『언어의 연금술사』에서


글의 맨 처음 언급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간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여기에 대한 답이 바로 우리의 바깥에 있다. 코트와 책 한 권 들고 무작정 떠난 ‘라이문트’가 안경을 새로 맞추고, 즉 새로운 눈을 얻고 숙소에 계속해서 머물며 셔츠도 새로 구입하는 모습은 마치 (익숙한 공간인 베른을 떠나와서) 다른 세상을 만나듯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 이야기는 만나리라 생각지 못한 누군가로부터, 그 누군가가 남겼으리라 생각지 못한 책에게로 이어지며 나아가 책의 저자로 향한다. 저자 ‘아마데우’의 이야기는 수십 년 전 격동의 포르투갈에서 혁명기를 보낸 ‘아마데우’와 가족, 친구 등 주변인의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평상시 우리가 배우들처럼 다른 캐릭터가 되어볼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자라면 다를 것이다. (...) 이렇게 다양한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본래의 나로서만 살아가는 것도 엄청난 낭비일 테니까."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에서, 컬처그라퍼, 2018, 214쪽.


다시 말해 ‘아주 작은 부분’이란 혼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고 나머지, 아주 큰 나머지는 삶이 만나는 다른 사람들과 삶의 경험들로 채워진다. 경험은 영화나 책, 일상의 수많은 풍경들, 여행, 환경 등이 만든다. 간접 경험은 마침내 직접 경험이 되어간다. 책 한 권. 영화 한 편. 한 사람. 이야기 하나. 여행을 떠나는 일이 낯선 비일상의 시공간에서 언제 어디에서 찾아올지 모르는 새로움을 만나러 가는 일인 것처럼 삶의 방향 역시 모르는 사이 조금씩, 혹은 아주 많이 바뀌기도 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삶의 방향을 새로 쓰는 우연의 여정이다. 그 시작은 주인도 저자도 알지 못하는 한 권의 책이었다. 지금껏 걸어보지 못한 방향으로부터 다른 나와 다른 이야기를 만나길 막연히 기대하며 매일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글을 쓴다. (2019.05.04.)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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