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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09. 2023

이 봄을 놓치기 아까운 우리들 모두에게

영화 '유브 갓 메일'(1999) 리뷰

“시간이 흐르고 인생도 계속된다. 차기작을 만들 수 있는 행운을 잡는다. 그래도 실패작은 거기 남아 있다. 지난 삶의 역사 속에, 난폭하고 강력한 힘을 빨아들이는 자기장을 거느린 블랙홀처럼.”

-노라 에프런,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 김용언 옮김, 반비, 2021, 172쪽에서


<해리와 샐리가 만났을 때>(1989)의 각본,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의 연출 및 각본 등의 작품들로 알려진 노라 에프런 감독은 자신이 쓴 에세이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생에는 언제나 성공의 벅찬 순간들만 찾아오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실패나 좌절의 순간,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때가 있다. 지금보다 여성 영화인의 입지가 훨씬 더 좁았던 시절에도 다수의 히트작을 배출한 노라 에프런에게도 지난 실패의 순간은 그렇게 회고된다. 그런 그가 연출한 1998년작 <유브 갓 메일>가을에서 시작되어 추운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의 문턱에서 이야기를 맺는 영화다.


영화 '유브 갓 메일' 스틸컷


<유브 갓 메일>의 주인공은 아동 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지역 서점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는 캐슬린 켈리(멕 라이언), 그리고 대형 서점 체인의 사장인 조 폭스(톰 행크스)다. 사실은 인터넷 채팅방에서 알게 되어 이메일을 교환하는 사이이기도 한 두 사람은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뉴욕의 정취와 필기구, 책 이야기 등을 주고받으며 친해진다. 인터넷 문화의 태동기였던 20세기말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의 발단은 조가 운영하는 서점 ‘폭스 앤 선즈’가 캐슬린의 서점 ‘모퉁이 서점’ 인근에 신규 지점을 열면서 생겨난다.


캐슬린의 서점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대형 서점의 등장으로 인해 큰 경영 위기에 처한다. 책을 매개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애착을 갖고 있던 캐슬린(닉네임 'Shopgirl')은 자신의 서점에 조카들과 함께 방문해 대화를 나눴던 손님인 조가 바로 ‘조 폭스’라는 걸 알고 적지 않은 배신감을 느끼고, 그 무렵 온라인으로 이어져 왔던 두 사람의 관계에도 약간의 휴지기가 생긴다. 대형 서점 사장인 자신을 캐슬린이 어떻게 여길지 모르지 않는 조는 자신이 ‘Shopgirl'과 이메일을 주고받아온 ’NY152'라는 것을 털어놓지 못한다.


2023년에 와 다시 보는 <유브 갓 메일>은 다분히 인터넷 환경을 통한 인적 교류의 본질적인 면을 생각하게 하지만 노라 에프런 감독의 인용을 상기하면서 영화에 대해 더 주목하게 되는 건 바로 인생을 계절의 흐름에 빗대는 일이다. 가을을 지나 겨울로 향하는 과정은 캐슬린에게 있어 말 그대로 서점 경영의 혹독한 추위를 맞는 일이다. 단골손님도 끊기고 신간 출간을 맞아 사인회 개최를 약속했던 작가도 캐슬린의 서점 대신 조의 서점을 찾는다. 생업의 기로에 서는 동시에 이메일로 친해졌던 ‘NY152'와의 교류가 더 진전되지 못하는 일 역시 긴 겨울을 나는 일처럼 인내가 필요하다. 그간 이메일의 형태로 ’NY152'에게 진솔한 고민을 털어놓고 일상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유브 갓 메일' 스틸컷

그렇다면 캐슬린에게 봄이란, 추위가 풀린 뒤 정원에 봄꽃이 만개하고 거리에 생기와 온기가 살아나듯 겨울을 겨울이게 했던 요소들의 변화를 겪거나 맞는 일이다. 그것은 대형 서점을 상대하는 작은 동네서점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지라도 다음을 다짐해 볼 수 있게 되는 일이며, 확신이나 선택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용기를 내는 일이다. 가끔 인생에 대해 회의가 들곤 해요이게 좋아서 선택한 삶인지 아니면 용기가 없어 이렇게 사는지 말이에요.”라고 이메일에 썼던 캐슬린은 과거의 실패보다 현재의 경험이 갖는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뉴욕의 봄을 놓치면 아깝잖아요라는 조의 말에 용기를 낸다.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기로 결심하고, 또 ‘NY152'에게 직접 만날 것을 제안하는 캐슬린의 봄은 혹독했던 코로나19를 (거의) 보내고 새로운 계절을 맞는 우리와 닮은 듯 여겨진다. 데이지 꽃을 좋아한다고 언급한 캐슬린에게 어떤 장면에서 조는 바로 그 꽃을 선물하기도 한다. 인생에서 맞이하는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해 기꺼이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새로운 일이 속한 계절을 선물처럼 끌어안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겠다. 지난 실패에도 낙관하기를 그치지 않는 마음과 현재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태도. 새 봄이 모두에게 그러한 행운의 계절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영화 '유브 갓 메일' 포스터


*본 리뷰는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2023년 3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s://www.kma.go.kr/kma/archive/pub.jsp?field1=grp&text1=skylove&field2=pubGroup&text2=2023#gal_year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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