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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04. 2023

몇 개의 계절이 지나야만 하는 일이 있다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2017) 리뷰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2017)은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10년 만에 재회하게 된 삼남매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실질적으로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던 둘째 ‘줄리엣’과 셋째 ‘제레미’는 물론, 오랜 해외 생활로 가족들과 소원해져 있던 첫째 ‘장’ 세 인물 사이의 관계가 중심이 되는 가운데 영화 속에서 포도를 수확하는 모습들이나 와인 저장고에서 각자 시음하는 모습 등은 영화가 인생의 한 시절을 와인에 빗대어 풀어내고자 함을 쉽게 간파하게 한다.


첫째 장은 세계 곳곳을 여행하다 호주에 정착해 아내와 아들을 둔 상태다. 삼남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온갖 종류의 포도와 와인을 맛보며 자랐고, 장은 호주에서도 와이너리를 운영하게 되었다. 커피가 산지에 따라 다른 풍미를 가지듯, 호주의 와인과 프랑스의 와인도 자연히 다를 것이다. 가족 문제를 뒤로 하고 농장 일을 나선 삼남매는 이웃 ‘마르셀’과 함께 각 구획별로 포도가 수확하기에 충분히 익었는지를 시식하며 가늠하는데, 이때 관건은 며칠 뒤 비가 내릴지 여부에 대한 의견 차이다.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스틸컷


네 사람이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포도를 8일 뒤에 딸지 10일 뒤에 딸지를 ‘토론’하는 대목에서 한편으로 인물들의 가치관도 엿보인다. 마르셀은 “나는 일기예보도 3일 이상은 안 보는 사람이야”라며 경험에 따른 직관적 의사 결정을 중시하지만, 줄리엣은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며 병상에 누운 아버지로부터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반면 호주에서 자신만의 와이너리를 가꾸고 있는 장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보다는 성인이 된 자신의 감각과 경험을 중시한다.


포도 수확에 있어서도 과거로부터 배운 것들이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는가 하면, 영화 중후반에는 아버지 대신 와이너리를 계속 운영할 것인지 혹은 관리 측면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처분할 것인지의 여부도 관건이 된다. 이때 호주에 가정을 꾸리고 있는 장은 와이너리를 처분하는 데 적극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지만, 이미 아버지를 대신해 운영을 전담하고 있는 줄리엣은 반대하고, 공교롭게도 셋째 제레미는 장인이 와이너리를 경영하고 있던 탓에 장인으로부터 아버지의 와이너리 일부를 처분할 것을 제안받기도 한다.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스틸컷


영화의 프랑스어 원제 ‘Ce qui nous lie’는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삼남매에게 있어서 그들을 구속하는 건 한편으로 아버지의 유산이다. 병상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와이너리와 집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제 각자의 삶을 꾸려나갈 삼남매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들에게 당면한 화두는 재산 배분의 문제나 소원해진 남매간의 갈등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여러 에피소드를 거치면서 함께 사계절을 보낸 남매는 어느새 한 마음이 되어 재산 문제와 별개로 지금 농장에 있는 포도를 수확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영어 제목인 ‘Back to Burgundy’가 상징하듯 이제 중요한 것은 ‘부르고뉴다운 것’, 다시 말해서 아버지로부터 이어져 온 와이너리의 전통과 특색을 지키는 것이 된다. 그러자 포도를 며칠 뒤에 딸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 아버지의 뜻에 맞는 판단을 하고자 했던 둘째 줄리엣이 설득력을 얻는다.


와인의 맛을 좌우하는 요소들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포도의 수확 시기와 숙성 방법 등이다. 세계 각지 와이너리들이 저마다의 철학과 산지 포도의 고유한 특성을 갖고 다른 곳과 구별되는 와인을 탄생시키듯, 사소하게는 포도를 당장 오늘 딸 것인지 며칠 뒤에 딸 것인지 결정하는 일도 맛에 영향을 준다. 다만 ‘화요일’과 ‘목요일’ 사이에서 갑론을박하던 삼남매도 당장 오후에 비가 온다는 걸 내다보지 못했듯, 인생의 많은 일은 당장 알 수 없고 시간이 지나야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으로 가득하다. 시간은 경우에 따라 사계절, 혹은 몇 년에 걸칠 수도 있다. 시시각각 바뀌는 일기예보처럼, 예측불허와 변화무쌍으로 가득한 인생의 관문들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금을 음미하며 다가오지 않은 불확실한 일에 조금은 겸허하고 가벼워지는 것이 아닐까.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국내 포스터


*본 리뷰는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2023년 5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s://www.kma.go.kr/kma/archive/pub.jsp?field1=grp&text1=skylove&field2=pubGroup&text2=2023#gal_year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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