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환상의 빛'(1995) 이야기
“머피의 법칙은 꼭 나쁜 일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의미야.”
-영화 <인터스텔라>(2014)에서, ‘쿠퍼’가 어린 딸 ‘머피’에게
왜 꼭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할까. 그런 제목의 소설도 있고, 돌아보면 그런 경험이었다고 생각할 만한 일도 없지 않겠다.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기어이 현실이 되어버리고야 마는 일들. 정도와 범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런 일 혹은 그런 마음 자체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은 일이라 함은, 적어도 그것에 관해 미리 생각했다는 뜻이다. ‘제발’ 혹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혹은 그저 만약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정도로. 그러나 그런 식으로라도 어떤 일을 예비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허락되지 않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영화 <환상의 빛>(1995)의 ‘유미코’(에스미 마키코)처럼.
“예컨대 인간은 살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저 죽고 싶어서 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생의 무도한 불가해함은 가혹한 허방인 동시에 매일 몸을 일으켜 다시 살게 만드는 요염한 신기루 - 환상의 빛이라는 것.”
-김혜리, 소설 『환상의 빛』책 뒤표지에서
‘유미코’는 일찍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상실들을 겪어온 사람이다. 할머니가 실종되고, 남편이 자살을 하고. 굳이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인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과론적 관점에서 보려는 게 아니어도, ‘유미코’의 입장이 아니어도 그 일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처럼 인사를 하고 출근했던 남편은 그날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얼마 후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이후 ‘유미코’는 재혼을 하고 새로운 가족과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나… 어떤 일로 다시금 전 남편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남긴 그림자에 다시 이끌린다.
물론 <환상의 빛>은 남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는 종류의 이야기도 아니기도 하거니와, 영화에서 ‘유미코’가 내내 겪는 일들에도 ‘왜’가 결여되어 있다. 거의 움직임 없는 관조적인 촬영이 만들어내는 정적인 분위기, 여러 번 등장하는 그 자전거, 그 철길의 공기. 누군가의 뒷모습. 사건 자체보다 그것이 일어난 뒤 한 가족 혹은 한 인물에게 찾아오는 고요한 파장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 특유의 미학은 이미 장편 영화 데뷔작인 <환상의 빛>에서 만들어졌다.
“그때 아주 시커멓던 하늘도 바다도 파도의 물보라도 파도가 넘실거리는 소리도 얼음 같은 눈 조각도 싸악 사라지고 저는 이슥한 밤에 흠뻑 젖은 선로 위의 당신과 둘이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 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피를 나눈 자의 애원하는 소리에도 절대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
-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송태욱 옮김, 바다출판사, 2014, 59쪽에서
‘유미코’가 갖는 “대체 왜”라는 물음, “왜 막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환상의 빛>은 해결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릴 적 모습을 통해 관객은 세상에 막을 수 없는, 일어날 일이라는 게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세상 모든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지나고 보면 그런 일들이 꼭 있지 않은가. 내가 막을 수도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것으로 인해 지금을 숨 쉬게 해주는 어떤 일들. 좋은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치와 섭리를 분석하고 이해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지금은 알 수 없는 어떤 흐름과 맥락에 마치 몸을 맡기듯 그것에 몰입하는 일. 그렇다면 삶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까닭 없이 철로 위를 똑바로 걸으며 세상을 등진 '당신'을 향해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유미코'의 고백은 고스란히 <환상의 빛>의 쇠락한 바닷마을 풍경이 된다. 이 영화를 보며 이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롤랑 바르트의 문장들 같은 것을 떠올리기도 했고, 자신을 떠나간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삶의 한순간을 잊을 수 없게 만들고야 마는 초월적인, 혹은 환상적인 시간들을 생각했다. (2020.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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