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May 02. 2023

이티 집에 전화해

영화 'E.T.'(1982) 리뷰

어떤 영화를 볼까 하고 작품들의 목록을 이것저것 살피다 선뜻 하나를 자신 있게 고르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볼 영화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본 영화들과 아직 보지 않은 영화들을 번갈아 살피며 '오늘은 어떤 세상을 만나볼지 망설이는 것' 정도로 표현해보겠다. 그 망설임의 이유 중 하나는 미지의 세계를 만나는 일의 떨림이 예전보다 약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망설임의 답은 지난 영화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자신의 머리와 마음 안에서 꾸는 꿈을 누군가에게 영상으로, 이미지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인들이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바로 그런 사람 중 한 명인데, 그의 수많은 대표작 중 하나인 <E.T.>(1982)는 아이의 시선으로 낯선 외계 생명체를 대하는 심정이란 이런 것이라고 생생히 말하는 영화다. 이때 '말하는'이라는 표현을 중의적 의미로 강조하고 싶다. 한 가지는 '정말로 발화하는 말'이고, 한 가지는 '말 대신에 보여주는 말'이다.


이 영화는 어떻게 관객을 미지의 세계로 인도하는가. 제목("Extra Terrestrial')이 말하는 바로 그 외계 생명체는 영화 시작 후 17분간 관객이 볼 수 없다. 어둠 속에서 어떤 형체 같은 것이 짧게 스치듯 눈에 잠시 띄지만, 관객이 보는 것은 'E.T.'(이하 '이티')의 흔적과 반응이다. 이티가 남긴 발자국을 소년 '엘리엇'(헨리 토마스)은 본다. (그리고 관객도 본다.) 인기척이 느껴진 집 앞 창고를 향해 '엘리엇'이 야구공을 던지자, 창고에서 다시 '엘리엇'을 향해 공이 돌아온다. 그렇게 <E.T.>는 미지의 세계를 섣불리 보여주지 않고 관객이 느끼는 궁금증이 고조되었다고 판단하는 바로 그 순간에야 이티의 존재를 꺼내놓는다.


영화 'E.T.' 스틸컷


 "요정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 살아날 수 있어요."


엄마가 여동생 '거티'(드류 베리모어)에게 동화 <피터 팬>을 읽어주는 동안 '엘리엇'이 종이에 벤 손을 이티가 "Ouch..."라는 말을 따라 하면서 자기 손가락을 대어 치료해준다. 영화는 '엘리엇'과 이티의 이러한 교감과 함께 엄마와 동생이 동화 속 이야기를 만나는 순간을 병치해놓는다. '엘리엇'은 처음엔 이티의 존재를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으려 했지만 우연한 일들로 동생과 형이 먼저 알게 된다. 이때 이티는 세 남매가 하는 말과 행동들을 고스란히 따라 하며 배운다.


 "이티 집에 전화해."


'엘리엇'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만화책을 읽던 이티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세 단어를 외친다. "E.T., Phone, Home." 그 말을 '엘리엇'과 아이들은 따라 한다. 똑같은 대사를 반복하면 그 의미나 효과가 옅어질 수도 있건만, <E.T.>는 아이들 눈높이에서 인물들의 반응과 반응(리액션)을 자연스럽게 배치해 오히려 반복을 메시지를 강화하는 데 쓴다. 처음엔 별개의 세 단어였던 저 말이 "이티 집에 전화해"라는 문장으로 바뀌는 순간, 어떤 일이 조금씩 일어난다. '엘리엇'은 이티가 무엇을 원하는지 캐묻지 않아도 이티의 뜻을 곧장 헤아린다. 나아가 둘은, 이티가 집에서 냉장고를 뒤지다 술을 꺼내 마셨는데 같은 시간 학교에 있는 '엘리엇'이 취한다든가 하는 순수하고 천진한 방식으로 교감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반드시 언급해야만 하는 이 영화의 명장면은, 그 유명한 '달빛 아래의 자전거'다. 이티를 데리고 자전거를 탄 채 길을 달리던 '엘리엇'은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어느 순간 공중으로 떠오른다. 페달을 밟지만 자전거 바퀴가 바닥을 박차고 달리는 게 아니라 공중에 뜬 채 (이티의 초능력으로) 날아오르는 순간이다. 처음에는 '엘리엇'이 보고 경험한 이야기를 아무도 믿지 않지만 마침내 꿈은 '공유된 것'이 된다.


추측컨대 '엘리엇' 혼자서만 이티의 존재를 알고 둘만의 교감이 영화 내내 이어졌다면 <E.T.>가 궁금하게 만들고, 말하고, 보여주는 미지의 꿈은 영원히 미지의 것으로만 남게 되었을 것이다. 꿈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이야기'의 형태로 공유할 때 비로소 '함께 꿀 수 있는 꿈'이 된다. 매 순간 수많은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의 홍수 속에 빠져 있는 우리는 새롭고 낯선 것을 만나는 설렘의 유효기간이 짧은 세상에 사는 중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순수한 꿈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각하며 유년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 꿈을 다시 꾸는 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는 사이언스 픽션의 외피를 입은 어드벤처일 뿐 아니라 유년의 초상을 고스란히 재현해낸 예술 작품이다. 그러니 상상하는 힘이 필요할 때, 이티 집에 전화해보자. 여기 꿈이 있다. (2019.09.30.)


영화 'E.T.' 국내 포스터


https://101creator.page.link/xhcd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매거진의 이전글 “참 멋진 인생이야, 안 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