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2020) 리뷰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2020)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007 살인번호>(1962) 이래 59년 동안을 이어온 <007> 시리즈가 이제는 낡을 대로 낡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여성을 탐하고 술을 즐기며 거칠게 임무를 수행해온 '제임스 본드'가 영화로 탄생한 1960년대는 냉전의 시대였다. 아군과 적군의 식별은 단순했고 그가 '살인 면허'를 무엇을 위해 쓰는지는 명확했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과 함께 그 무엇도 쉽사리 확신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고, 본드와 오랜 고락을 함께한 펠릭스(제프리 라이트)조차 "요즘에는 악당과 영웅을 구별하기 어려워졌다"고 토로한다. 이제 군인과 스파이는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적어도 영화 속에서, 이제 요원은 명령만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가치관과 신념에 의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도록 요구받아왔고 그건 '제임스 본드'든 '이단 헌트'든 '제이슨 본'이든 마찬가지다. <007 카지노 로얄>(2006)을 시작으로 <007 노 타임 투 다이>(2020)에 이르기까지 다섯 편의 영화 속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몸소 겪은 것을 넘어 직접 그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지금 써내려갈 기록은 '노 타임 투 다이'에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반추하려는 이야기가 되겠다.
빌리 아일리시가 부른 주제곡 ‘No Time to Die’가 흘러나오는 시리즈 특유의 화려한 오프닝 크레디트가 나오기 이전까지, 23분 가량에 걸친 영화의 긴 프롤로그 중 2/3 가량은 바로 시리즈 전작인 <007 스펙터>(2015) 직후의 시점을 다룬다. 마들렌 스완(레아 세이두)과 함께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마테라’로 휴양 온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007 카지노 로얄>의 히로인이었던 베스퍼 린드(에바 그린)에 대한 아픈 기억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마들렌도 그걸 알고 있다. 두 사람이 온 곳은 바로 베스퍼의 묘가 있는 지역이기도 한데, 숙소에서 밤을 보낸 이튿날 새벽, 제임스 본드는 길을 나선다. 다시 한 번 베스퍼 혹은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기 위해.
묘에 당도한 제임스는 “Forgive me.”(용서해줘)라고 적힌 쪽지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바닥에 떨어뜨린다. 쪽지를 떨어뜨린 뒤에는 “I miss you”(보고 싶어)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금 말하는 중이다. 이제 제임스에게 남은 과제는 두 개다. 과거로부터 작별하는 일과, (베스퍼에게 용서받기 위해)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일. 이 지극히 평범하게 들리는 일이 그에게는 생을 걸어야 할 만큼의 일이다. 시리즈를 거쳐오면서 그에게 닥쳐오는 많은 일들은 숙적인 '스펙터'와 관계되어 있고 그중 많은 것들은 바로 베스퍼와 마들렌이 연루된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결국, 제임스 본드의 가장 사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사로 표현하자면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로 시작해 "You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로 끝나는 영화다. 둘 다 제임스의 말인데, 요컨대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은 세상 모든 시간을 내가 아닌 당신에게 선물하기 위해 일생을 던진다. '카지노 로얄'에서도 '노 타임 투 다이'에서도 결국 이야기 중심은 '사랑'에 있었다. 누군가는 뻔하다 할지라도 본드에게 그것은 진심이었다는 걸 대변하듯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역대 시리즈 중 상영시간이 가장 길다. 그 긴 시간을 제임스는 스스로 멀어지기를 택했던 마들렌을 되찾는 데에, 그리고 해후한 마들렌을 지켜내는 데에 쓴다. 그러면 왜 'We'는 나를 제외하고 이제는 'You'가 되어야 하는가.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본드 영화여서?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본드가 택한 스스로의 가치과 명분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오프닝에서 마들렌이 탄 기차는 출발하고 제임스는 플랫폼에 그대로 서 있다. 마들렌이 열차 안에서 걸음을 옮겨보지만 그 자리에 선 제임스는 점차 뒤로 멀어진다. 영화의 시작부터 제임스는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물러난다. 상징적인 코드네임인 ‘007’ 또한 2년차 요원인 ‘노미’(라샤나 린치)에게 내어준 상태다. 그는 나이가 들었고 이제는 현역의 신분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다시 움직이는 건 작중 사건들이 베스퍼 묘의 폭발부터 시작해 ‘스펙터’와 관련을 맺고 있는 점, 거기서 마들렌을 떼어놓을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블로펠드’와 다시 대면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은 순간, ‘사핀’(라미 말렉)이 제조한 향수 때문에 제임스는 마들렌의 손목을 접촉한 뒤 이어서 자신의 손으로 블로펠드의 숨을 끊어놓는다. 조금 뒤에 가면 불가피한 상황 때문이기는 하지만 펠릭스의 죽음을 곁에서 맞이하는 것도 제임스다. 의도했든 아니든 한 시대를 함께한 이들을 아군이든 적군이든 떠나보내는 일을 제임스는 제 손으로 행하게 된다.
반면 작품의 메인 빌런인 사핀의 목적과 배경은 불분명하다. 단지 자신의 가족을 죽인 ‘미스터 화이트’의 딸인 마들렌에게 복수하기 위해? 혹은 가공할 무기를 손에 넣고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얼핏 ‘닥터 노’를 연상케 하는 복장과 외양을 갖춘 그는 마들렌과 제임스의 숨통을 조여오지만 결정적인 순간 자신의 카리스마와 파괴력을 드러내는 대신 제임스에게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당한다. (제임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마들렌과 마틸드를 타깃해 영구적으로 작동하는 나노봇을 심었으니 온전히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겠지만)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온전히 제임스 본드가 주인공이어야만 한다는 듯 룻지퍼 사핀의 존재를 흐린다.
그러나 사핀은 마치 상처를 가리고 연령을 숨기는 듯한 모습에서 시간에 굴복당하지 않기 위해 애써온 인물인 듯 보인다는 점에서 제임스와 결을 달리한다. 그는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를 원하며 제임스의 능력을 ‘죽고 나면 사라질’ 것으로 폄하한다. 반면 제임스는 스스로의 존재가 사랑하는 이에게 치명적으로 가 닿을 것을 직감한 순간 망설임 없이 희생을 선택한다. 어떻게든 살 길을 찾고자 골몰하는 대신 사랑하는 이에게 전해질 수 있는 위협을 가능한 확실하게 차단하고자 격납고의 방호벽을 열어젖힌다.
이 글의 제목으로 삼은 “참 멋진 인생이야, 안 그래?”라는 말은 펠릭스가 죽기 직전 제임스에게 남긴 말이다. 제임스가 구해온 쿠바산 시가를 끝내 피우지 못했지만, 펠릭스는 제임스와 함께한 즐거웠던 나날을 떠올리며 물속에서 눈을 감는다. 영화 오프닝에서 조금 더 빨리 가자던 마들렌에게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고 했던 제임스는 눈앞에서 소중한 동료를 잃었다. 이제 시간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걸고 지켜내야만 지속될 수 있는 무엇이 되었다. ‘카지노 로얄’에서 제임스가 ‘007’로 거듭난 건 처음 사랑했던 베스퍼의 존재 때문이었고 ‘노 타임 투 다이’에서 그가 은퇴했음에도 다시 ‘007’의 임무에 나선 건 마들렌을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앞에서 자신이 (과거 베스퍼에게 그랬던 것처럼) 의심해 떠나보냈던 마들렌을 다시 대면하고 스스로의 판단이 옳지 않았음을 깨달은 이상 그는 모든 걸 바쳐 그 사랑을 지켜내려 한다. 이로써 그는 단지 존재하지만 한 게 아니라 삶을 정말로 살아낸 인물이 되는 것이다.
헤어져야 함을 직감하고 제임스는 “시간이 더 있었다면”이라 울먹이는 마들렌에게 “당신에겐 얼마든지 시간이 있다”라고 말해준다. 제임스를 영웅적 존재라 칭할 수 있다면 그는 <원더 우먼>(2017)에서 “나는 오늘을 지킬 테니 당신은 세상을 구하라”고 했던 스티브 트레버를 닮았다. 오늘을 지켜낼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한 사람에게 오늘 이후의 시간을 선물한다. 제임스 본드는 자신의 이유를 사랑에서 찾았고 그 사랑을 받은 이들은 똑같이 제임스에게 사랑을 선물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존재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또 누군가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마들렌은 마틸드에게 제임스 본드라는 사람이 있었다며 이야기 하나를 해주겠다고 한다. 물론 그 이야기는 ‘카지노 로얄’부터 ‘노 타임 투 다이’까지 겪어온 관객 모두가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언 플레밍의 『두번 산다』(1964)에 “우리는 두 번 산다. 한 번은 태어났을 때, 그리고 한 번은 죽음에 직면했을 때”라는 구절이 있다. 이 이야기는 그래서 “James Bond Will Return"이라는 문구를 남긴 채 끝날 수 있다. 시간은 죽지 않고,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시간 또한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잡지 [무비고어] 3호의 원고를 위해 쓴 글이다. (202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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