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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l 09. 2023

유한한 만큼 더 온전히 만끽하는 여름날이 되기를

영화 '봄날은 간다'(2001) 리뷰

아마도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이 말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라면 먹을래요?”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와 아나운서 ‘은수’(이영애)는 한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계기로 전국 각지의 ‘소리’를 찾는 여정을 함께하며 가까워진다. 점차 호감이 생기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편집을 마친 어느 밤 은수의 위와 같은 말로 급물살을 탄다. 함께 집에서 라면 먹자는 말로 사랑의 시작을 알렸던 둘의 이야기는 후반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상우의 말로 그 사랑의 끝을 고한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2001)가 한국 멜로 영화계의 걸작으로 꼽히는 요인은 단순히 위와 같은 유명한 대사나 배우들의 존재만은 아니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고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지만 쌓이는 오해와 앙금들로 서로 어긋나는 연애담은 숱한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지만 <봄날은 간다>를 특별하고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게 하는 건 제목에서 짐작되듯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온다는 자명한 사실을 관계에 빗대어 표현한 연출과 각본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 스틸컷


상우와 은수의 첫 만남은 겨울에 일어난다.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산속 대숲에서 댓잎이 바람에 날리거나 대나무 가지들이 서로 부닥치는 소리를 함께 담는 두 사람의 모습은 갈대숲이나 개울가와 같은 자연의 평범한 장소들을 아우른다. 자연의 소리가 매 계절마다 같지 않다는 걸 두 사람은 알고 있다. 라디오 애청자들에게 생생한 소리를 담아 전하기 위해 발소리 같은 잡음 하나에도 민감한 채 지향성마이크가 닿는 곳을 주시하는 상우의 진지한 표정이라든지, 그런 상우와 여러 버전의 녹음본을 두고 두 번째가 더 낫니 세 번째가 더 낫니 오가는 은수의 모습은 사랑에는 서툴렀을지라도 자연의 천변만화가 만들어내는 신비를 감각할 줄 아는 이들로 비친다. “바람 불고 눈보라 칠 때가 좋지. 솨 소리가 나면 그 마음이 심란하던 게 기분이 확 풀리고 얼마나 좋노.” 두 사람이 함께 인터뷰하던 어느 할머니도 밥 먹고 가라며 상을 내어오고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에 그와 같은 힘이 있는 건 특정한 계절이 무한히 지속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끝나기 때문일 것이다. 봄이 겨울의 끝에서 시작을 알리듯, 봄 역시 여름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어 있다. “봄이 간다”라 하지 않고 “봄날은 간다”라고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단지 계절의 흐름만을 내포하지 않고, 특정한 계절에 우리 각자가 실어 보내는 저마다의 의미를 담아 ‘봄날’이라고 하지 않았겠는지.


영화 '봄날은 간다' 스틸컷


한 소설가는 소설 쓰기에 대해 말하며 “봄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쓰지 말고, 무엇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꼈는지를 쓰세요”라고 언급한 적 있다. 시간이 지났을 때 우리가 지금을 돌아볼 수 있는 바탕에는 추상적인 관념보다는 몸이 직접 감각했던 것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상우는 은수가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를 단지 은수의 목소리로만 기억하지 않고 함께 녹음했던 해변가 파도 소리와 겹쳐서 기억한다. 콧노래 소리를 더 잘 녹음하고 싶어서 지향성 마이크를 바다 쪽이 아니라 은수가 서 있는 곳을 향해 슬쩍 가져다 대던 자신의 행동도 그 기억에 함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언젠가 끝나고 책도 결국 마지막 장을 드러낸다. 삶도 그러하며 관계도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 이 계절이 영원하기만을 바라는 대신 결국 지나갈 것을 선언하고 맞이하는 일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지금 여기’를 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감각들로 기억되게 해 준다. 불변처럼 여겨지던 사계절의 흐름이 점차 불규칙해지거나 이상현상도 찾아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날씨와 자연현상은 일면 정확하다. 오월이면 길가에 장미가 피고 유월이면 점차 기온과 습도가 높아진다. 다가오는 칠월도 과거 그래왔던 것처럼 대체로 덥고 습하겠지만 우리 주변에는 다시 반복되지 않을 특별한 순간들이 가득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봄날은 간다> 같은 영화들이 등장하던 2000년대 초가 흔히 한국 영화계의 다시 오지 않을 멜로 황금기로 회자되듯, 일상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만큼 온전히 행복한 나날들로 우리의 여름이 채워지기를 바란다.


영화 '봄날은 간다' 포스터


*본 리뷰는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2023년 7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s://www.kma.go.kr/kma/archive/pub.jsp?field1=grp&text1=skylove&field2=pubGroup&text2=2023#gal_year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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