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Aug 02. 2023

착한 사람, 혹은 아름다운 사람의 소나타

영화 '타인의 삶'(2006) 리뷰

좋은 영화가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사회에서 좋은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맥락에서 어떤 사회에 좋은 영화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담론이 생성되지 않는 그 사회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공간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절망하고 있다면 절망의 영화가, 포기하고 있다면 포기의 영화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지요.

변영주, 『영화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 창비, 2018, 13쪽에서.)



영화 <타인의 삶>(2006)이 만들어지는 사회란 통일 이전의 동독의 모습보다는 더 나아져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영화감독 변영주의 책에서 한 대목을 인용했다. 200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타인의 삶>은 후술 할 시대적 배경을 다룬 영화로서는 조금 독특하게도 비밀경찰 간부인 ‘비즐러’(울리히 뮈헤)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한다. 그 점에 대해 좀 더 설명해보도록 하자. 비밀경찰 대학에서 용의자를 심문해 자백을 받아내게 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하던 ‘비즐러’ 대위는 자신의 동료이자 상사인 ‘그루비츠’(울리히 터커) 중령으로부터 임무를 하달받는다. 연극 연출가인 ‘드레이만’(세바스티안 코치)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는 것.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아파트 출입문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며 ‘비즐러’는 2교대로 그의 일상을 24시간 추적하며 매일 시간대별 보고서를 남긴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자신의 직업에 기계적으로 충실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던 ‘비즐러’가, 어느 날 ‘드레이만’이 연주하는 한 소나타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는 장면. 영화 <타인의 삶>의 변곡점은 이곳이다. 그는 왜 자신이 감시하는 사람의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렸을까?


영화를 연출하고 각본을 쓴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 음악을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갔다”라고 말한다. ‘비즐러’가 들은 곡은 레닌이 “그 곡을 끝까지 들었다면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다. 자신의 감시 대상이면서 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를 알아내야 할 바로 그 인물에게서 눈물이 발생했다면 그건 무엇 때문일까. 물론 <타인의 삶>은, 동독의 국가보안부가 행했던 일들 - 영화 서두의 자막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당대의 예술가들을 감시, 감청하고 검열했던 일들 - 을 옹호하거나 그 일을 행한 사람에게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할 생각이 없다. 단지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한 인간의 운명을 재현하려 노력하는 영화라고 하는 쪽이 가깝겠다.


영화 '타인의 삶' 스틸컷


영화의 각본은 본래 제목이 ‘착한 사람의 소나타’였다. 과연 ‘비즐러’는 착한 사람이었을까? 영화만으로는 명확히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를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자유주의 예술가들을 감시하거나 탄압한 사람들 혹은 그에 일조한 사람들이 모두 뿔 달린 악마는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일상을 소리로만 접하면서 그에게서 벌어지는, 혹은 그가 행하는 어떤 일에 대해 눈물 흘릴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을 ‘이야기’의 힘이 아니고서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앞서 영화가 실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한다고 쓴 이유는, 바로 ‘비즐러’ 역을 연기한 주연 배우 울리티 뮈헤 역시 동독 시절 국가보안부 비밀 요원들의 시찰과 감시를 겪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1990년대 이르러 그 역시 자신에 대해 당시 요원들이 남겼던 문서 기록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고 한다. 게다가 영화에 등장하는 도청 장치와 같은 기계들은 소품이 아니라 동독에서 사용했던 실제 물건들을 사용했다고 한다.


‘드레이만’은 겉으로는 체제에 순응하는 듯 처신하지만 은밀하게 예술가로서 시대의 목소리를 낼 방법을 고민하고 또 직접 행동에 나서는 인물이다. 그를 감시하던 ‘비즐러’는 단지 피아노 곡 하나에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넘어, ‘드레이만’에 대한 보고서에 실제 자신이 들은 내용이 아닌 것을 거짓으로 적기도 한다. 영화 <타인의 삶>이 결말로 향하면서 관객에게 남기는 감흥은, 과연 ‘비즐러’가 무엇 때문에 ‘드레이만’의 일을 옹호하고 직접 숨겨주기까지 했는지에 대해 얼마나 공감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직접 겪지도 않은 일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비즐러’는 자신이 맡은 일의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하면서 단지 일상의 소리와 대화가 아니라 한 사람의 다가오는 일생을 체험한다.(정현종 시 ‘방문객’으로부터) 1인분의 삶을 살며 우리는 얼마든지 몇 배의 이야기를 경험한다. <타인의 삶>은 절망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면서 바로 그 간접 경험이 전하는 생의 의미에 대해 관객도 함께 체험하게 만든다. (2019.04.10.)



https://101creator.page.link/xhcd


영화 '타인의 삶' 스틸컷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매거진의 이전글 불완전한 세계에서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