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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20. 2023

01. 하마터면 이직에 성공할 뻔했다

지나고 보니 그것도 '지금'의 시작


호기롭게 사무실을 박차고(?) 나섰지만 퇴사 후 흔히 말하는 것처럼 수십 군데 회사에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지는 않았다. 그래도 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관적으로) 여겨지거나 혹은 (이 또한 주관적으로) 상대적으로 더 가고 싶다고 여겨지는 곳을 고르느라 나름대로 돌아보자면 '몇 군데'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면접을 보았다. 양손의 열 손가락으로 꼽기 조금 모자랄 만큼의 '입사지원'을 했을 것이고, 그보다 적은 수의 회사에서 서류에 통과했다. 중소 수입 혹은 배급사의 마케팅팀이나 배급팀, 그리고 이름을 들으면 모두가 아는 할리우드 직배사의 계약직 등이다.


형편이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면접에서 떨어지고 나면 그렇게까지 낙담하지 않았다. '아, 이 회사에 갈 운명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신사, 안국, 시청, 역삼 등 장소도 다양했다. 같은 업계임에도 회사마다 면접을 보는 방식 - 그러니까 사소하게 예를 들면 면접자를 상대하는 면접관의 수, 질문의 범위와 종류, 현장에서의 과제 혹은 테스트 여부, 면접자가 본인(나) 외에 복수로 동시간대에 있는지 여부 등 - 이 달랐다.


그 무렵, CGV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기억에 남는 한 곳이 있다. 3차까지 면접을 봐서 최종 합격했으나, 입사 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입사하지 않은 곳. 정확히 말하면 출근일자를 조율하기 직전 입사가 취소되었던 곳. 한 배급사였다. 1차로 실무진과 가벼운 면접을 보았고 2차로 해당 회사의 대표이사가 참석한 면접이 있었다. 실무 역량을 확인하기 위한 최종(3차) 면접에 앞서서는 사전에 제출할 과제가 있었다. 그 회사의 개봉 예정 영화 한 편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 기획안, 그리고 배급 업무의 연장선에서 특정 영화관을 선정하여 그곳을 방문 후 해당 극장(업계에서는 '사이트'라도도 한다)에 대한 후기를 자유 양식의 PPT로 기술하는 것이었다.


보도자료 작성을 현장에서 시킨다든지 하는 실기(?) 테스트가 영화업계 아니어도 특히 PR과 관련한 직군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쓸 만한 결과물이었는지 내가 과제로 제출한 보고서들은 괜찮게 평가를 받았고, 최종 면접 후 이제 입사 시기 등을 조율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시점을 복기하기 어려우나) 입사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무렵 실무진에게서, 대표이사의 판단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입사가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사유를 들은 것은 "실시간으로 연락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입사 일자 등을 조율하기 위해 그 무렵 이메일이 아니라 문자 혹은 전화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내 답신이 '신속'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떤 업계에나 임원 중 어떤 분들은 자신의 연락을 부하 직원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즉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그 회사 입사는 정말로 취소되었다. 2018년 상반기 중 어느 날의 일이다.



당시에는 입사가 확정(?)되었던 상태에서 갑자기 취소되었으니 당연히 당혹감 내지는 좌절감 같은 것이 없지 않았겠으나, 현재에 와 생각하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귀결이었던 것 같다. 이유는 물론 그때보다 지금 스스로 더 성장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 회사의 이후 개봉 영화 라인업이 그다지 극장 흥행 등의 측면에서 소구력을 얻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극장 개봉 자체를 하지 않는(즉 부가 시장으로 직행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영화를 담당했는가'도 커리어에서 중요한 사항이다. 만약 그 회사로 출근했다면 얼마나 다녔을지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내 커리어에 어떠한 영향을 얼마나 미쳤을지에 대해서도 가늠하기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지나온 그 모든 회사들의 채용 전형에 통과하지 못하거나 입사하지 못했던 것은 내게 다행스럽게 일어난 일이라고. 나는 하마터면 그때 이미 이직에 성공할 뻔했다.


'그 회사'의 면접을 보던 그 무렵 영화 '스탠바이, 웬디'의 시사회에 참석했었다.
그 무렵 본 영화 - <스탠바이, 웬디>(2018.05.30 국내 개봉)

(...)
영화의 원제인 ‘Please, Stand By’는 ‘웬디’가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는 일이 있을 때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스코티’가 만든 주문이지만, ‘웬디’는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 트렉> 속 등장인물 ‘스팍’이 말하는 것처럼 전진한다. “논리적인 결론은 단 하나, 전진입니다.” ‘웬디’는 매 순간 멈추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쓴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웬디’가 쓴 시나리오의 공모전 수상 여부도 제출 여부도 아닌, ‘웬디’가 그것을 쓴다는 일 자체다.

(...)
<스탠바이, 웬디>는 ‘웬디’에게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주거나 극적인 당선의 영광을 안겨주는 성공담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웬디’처럼 <스타트렉>을 좋아하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의 꿈을 응원해주고 지켜봐 주는 사람을 등장시킨다. 그들이 곁에 있다는 건 ‘웬디’가 자폐여도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겠고, 멈추지 않고 계속 쓸 수 있는 한 ‘웬디’의 시나리오는 언젠가 <스타트렉>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약간의 낙관과 희망. 그거면 충분하다고.
영화 '스탠바이, 웬디' 국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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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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