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N잡러'로 살고 있다
2017년 12월 중순 어느 날.
그날 하루 동안의 일들이 대체로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에이전시(대행사)에서 개봉 영화의 홍보와 마케팅을 담당하는 약 2.5년 차 마케터였던 나는 그때 마지막 출근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를 들면 영화 수입사나 배급사로의 이직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잘 될 거야. 나름대로 충분한 경험을 한 것 같아. 이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고 싶어.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 법한 생각들. 뭐가 그렇게 자신감에 차 있었을까? 무엇이든 잘 풀릴 거라고. 어디로든 나는 가서 또 새롭게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근거도 기반도 없이 나는 어쩐지 확신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1년 하고도 10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나는 '프리랜서처럼 보이지만 실은 백수인'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몇 군데의 회사의 면접을 보기도 했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던 나날들. 이대로 커리어가 멈추는 것인가 하는 우려 속에서도 대책 없이 신작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향했던 나날들. 그때 나는 확실한 수입이 없는 채로 모은 돈과 약간의 부수입 같은 것들로 '연명'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을 때, 나는 마치 '이제는 영화인이 아닌 것처럼' 느끼며 그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직장인의 루틴 속에 다시 복귀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이상하게도 어떤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의 변화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또 다른 기회를 열어준 것만 같았다.
2018년. 지금 생각하면 그 시기는 마치 커리어가 멈춘 시기와도 같았다. '회사'를 다니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회사를 다니지 않더라도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보거나 읽거나 쓰고 있었다. 그때 만났던 영화들은 여전히 인생에서 특별히 각별한 작품들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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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빌보드>. 3월 초 CGV '아카데미 기획전'을 통해 만났던 그 영화는 '내 인생의 영화' 정도로 이름을 올려야 할 최고의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가면서 결정하자고."(I guess we can decide along the way.)라는 말이, 삶의 모든 걸 다 결정해 놓은 채로 갈 수는 없다는 그 말이 나를 그 영화를 만나기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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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 플레이어 원>. 3월 말 극장에서 만난 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걸작도 내게는 그 어떤 순간에도 힘주어 이야기할 수 있는 특별한 영화로 남게 되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경험인지를, 그것이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음을 상기시켜 주면서도 좋아하는 것들을 아끼고 더욱 사랑하는 일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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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이즈 본>. 훌륭한 리메이크 사례로 남을 이 영화는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찾아올 '스타 탄생'의 순간이 내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믿게 해 주었다. 영화 한 편이 반드시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건 그냥 영화이니까. 그렇지만 어떤 영화는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어 다행"이라고 여기게 만든다. 그 순간 나는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기로 결심한 사람이 되었다.
이것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기에 할 수 있는 말들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적당히 절박했고 어느 정도 낙관하고 있었으며 매 순간 요행을 바랐던 것 같다. 그렇지만 생각지 못한 나날들에 웃기도 했고 비슷한 생각이나 취향을 가진 타인으로부터 위로를 얻기도 했다. 요컨대 돈이 없어도 영화는 계속 봐야 했던 순간들. 앞날을 모른 채로 미지의 신작 영화에 기대며, 다만 기록의 행위를 지속하며 그 기록이 무엇인가 삶에 쓸모 있는 것이 되어주기를 바랐던 날들.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는 제법 영화와 상관없는 분야와 직무의 직장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영화에 관해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로 몇 편의 리뷰를 쓰며 몇 편의 청탁 원고를 쓰며 몇 개의 강의를 하고 여전히 아직 만나지 못한 미지의 영화들을 꿈꾸고 있다. 어느 날에는 마치 스스로가 더 이상 영화와 관련된 그 무엇에 종사하지 않게 된 사람인 것처럼 여겼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지나고 보니 나는 영화를 추구하기를 멈추었던 날이 없었고 생각지 못한 기회들과 맞물려 N개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어왔다. 내 '글쓰기 강의'를 함께한 수강생의 글에 대하여 개인적인 소감과 감상을 피드백의 형태로 회신하면서 이 프롤로그를 퇴고하는 중이다.
이제부터 써 내려갈 이야기들은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만들기 위하여 분투했으나 좌절하고 차선을 택했을 이들이나 '덕업일치'를 성취하지 못하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였을 이들에게 제법 유효한 기록이 될지도 모르겠다. 꼭 좋아하고 추구하는 일과 실제로 수행하는 일이 일치하지 않아도 좋다. 기회는 만들어지기 마련이고 어떤 경우 그것은 예상치 못하게 부여되거나 그간 축적된 자신의 결과물로 말미암아 '탄생'한다.
나 또한 앞이 보이지 않았던 순간들이 있다. 그렇지만 커리어가 바뀌거나 잠시 멈추게 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제법 괜찮은 '이력'이 만들어지더라는 것을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퇴사해도 괜찮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힘든 순간들을 지나 어떻게 지금의 'N잡러'가 되어 있는지에 관한 기록들이 앞으로 쓰게 될 글들의 핵심이 될 것이다. 만약 내 이야기가 도움의 형태로 다가갈 순간이 있다면 이 글을 읽는 누구든 문을 두드려 주시기를. N잡러가 되거나 덕업일치를 실현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누구든 손을 들어주시기를. 내 몇 해 동안의 미약한 여정이 당신들에게 작게나마 영감 내지는 참고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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