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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Nov 26. 2023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떠올리며

영화 ‘남산의 부장들’(2019) 리뷰

어릴 때도 책을 나름대로 가까이 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어릴 때는 성인이 되기 전.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좋은 이야기’라는 게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했고 손에 잡히는 것과 마음에 이끌리는 것, 혹은 단지 재밌다고 느끼는 것들을 편협하게 골라 읽었다. 『로마인 이야기』나 『삼국지』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며 읽은 소설 중 하나다. 그리고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역시 같은 시기에 읽었다.


당시의 감상을 지금에 와 떠올려보자면 이렇다. “우리나라(남한)도 핵을 가질 수 있었다고? 오오오! 우와! 대박!” 출간 당시 400만 부가 넘게 팔렸다는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한국계 미국인 이론물리학자 이휘소(1935~1977)를 중심 모티브로 삼는다. 골자는 남한이 독자적으로 핵 개발을 추진하고 마침내 남북한이 힘을 합치는 내용. 이휘소 박사를 미국이 제거했다는 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듯 보이는 이 소설은 역사 속에 가려지거나 실현되지 못한 것을 되찾거나 그로부터 (주로 남북한이 힘을 합한) 세계 속의 국가적 위상을 드높이는 국수주의적 사고관을 담고 있다. (김진명 작가의 다른 소설들이 그렇듯) 내 어리고 짧은 독서력으로는 ‘뭔가 멋있는’ 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


역사 소재를 다루면서 그 국가나 민족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결국은 문체 내지는 화법, 혹은 작품 전반을 통해 느껴지는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상기의 김진명 소설이 나쁜 책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소설도 영화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흘러 여러 콘텐츠를 접하는 가운데 돌아보면 소위 ‘국뽕 한가득’ 담긴 작품들보다는 차분한 이야기가 내 취향에는 더 맞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2019)은 내게 우민호 감독의 연출력에 대해 어느 정도 긍정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뜨거운 사건으로 손꼽을 수 있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을 (물론 논픽션 원작이 있지만) 영화화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남산의 부장들>은 제작 단계에서부터 이미 고민이 많았을 수밖에 없다. 그 고민들을 영화가 풀어낸 방식은 꽤 흥미로운 점이 있다.


우선 (당연하게도) 일부 픽션이 가미되어 있음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남산의 부장들>이 주목하는 건 바로 그 ‘남산의 부장들’(당시 중앙정보부를 칭하던 말) 당사자들의 내면이다. 가령 ‘김규평’(이병헌)은 ‘박 대통령’(이성민) 집권 말기에 어떤 생각을 하며 중앙정보부장의 자리에 있었을까. (‘김규평’은 김재규가 모델이고 ‘박 대통령’은 박정희가 모델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등장인물의 이름을 일부 변형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김규평’은 부마 항쟁,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제명 등 일련의 사태에 온건하게 대처하기를 원했지만 ‘박 대통령’과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은 캄보디아의 독재를 언급하며 군사적 강경 진압을 원했다. 사사건건 경호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의 견해 차이가 발생하며 ‘박 대통령’의 신임도 점차 중앙정보부장에서 경호실장으로 옮겨가고 때마침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의 ‘박 대통령’에 대한 폭로 사건까지 생기며 <남산의 부장들>은 혼란한 정국 속에서 ‘김규평’의 고요한 듯 요동치는 내면 묘사에 주력한다.


실제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 집권할 때부터 함께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김규평’은 영화에서 그의 ‘혁명’부터 함께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점은 ‘김규평’의 심리 묘사와 그 변화를 묘사하기 알맞다. ‘박 대통령’은 영화에서 양적인 등장 비중 자체가 크지는 않음에도 등장하는 매 순간 영화의 분위기를 알맞은 긴장감으로 이끈다.


영화 말미에는 ‘10.26 사태’ 이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수사 결과 발표, 그리고 김재규의 법정 진술 음성이 나란히 삽입되어 있다. <남산의 부장들>은 ‘박 대통령’을 특정한 위치에서 묘사하기보다 ‘부장들’의 입장과 인물들의 군상을 골고루 묘사하면서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과연 이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원작을 쓴 김충식 작가는 ‘10.26 사태’에 대해 “절대 권력과 성장한 민권 사이의 빅뱅”이라고 논평한 적 있다. 남산에 무궁화 꽃 피던 시절, 어떤 ‘역사’가 일어났다. 비록 이 글을 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지만.



영화 '남산의 부장들' 메인포스터


*위 글은 2020년 1월 29일에 쓴 글이다.


https://brunch.co.kr/brunchbook/whyikeptwriting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인스타그램: @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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