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2020)을 감상했다. 그 이야기를 식물에 대한 인용으로부터 시작해 볼까. 김소연 시인의 산문 『시옷의 세계』(마음산책, 2012)에는 '상상력 - 미지와 경계를 과학하는 마음'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조금 간추려 소개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시인은 창가에 두고 키우던 벤자민 나무가 말라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키우던 정도 있고 처리할 바를 몰라 한동안 그 자리에 뒀는데 시간이 지나자 죽은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 있는 풍경을 목격했다. 싹은 그렇게 자라나 다시 작은 나무가 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며 시인은 나무에 태양에너지가 전달되는 '보이지 않지만 그어져 있는' 선을 상상하면서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를 체감했다고 쓴다.
김소연 시인 산문 '시옷의 세계'에서
조금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도종환의 시 「단풍 드는 날」에서 아래 부분을 인용하면서 그의 시가 단지 단풍이 드는 나무의 모습을 ‘사람에 빗대어’ 쓴 것이 아니라 그가 나무의 잎이 단풍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알기 때문에 쓰였다고 말한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삶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푸르던 잎이 노랗거나 붉은 잎이 되어가는 일은 나무가 겨울을 나기 위해 양분이 필요한 몸을 최소화하고자 잎을 떨어뜨리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나무는 잎과 가지 사이에 식물학 용어로는 ‘떨켜’라 불리는 물질을 생성해 잎의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양분이 가지로 향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것이 잎의 색소 침착을 일으켜 우리가 보는 색을 만든다. 낮은 온도와 건조한 환경에 대응하고자 나무는 결국 잎을 떨어뜨린다(낙엽). 겨울의 강한 바람이 제 잎들을 떨어뜨리도록 허락한다. 도종환 시인은 그 원리와 현상을 나무의 결심과 나무 생의 절정이라는 언어로 표현했다.
그와 같은 이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자리에 관심, 공부, 연구, 그런 단어들이 개입된다. 현상을 보면서 경탄하고 지나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의문이나 호기심을 갖고 파고드는 일이 시의 세계도 확장시킨다. 그건 리처드 도너의 영화 <슈퍼맨>(1978) 속 렉스 루터의 말처럼 “껌종이에 적힌 성분표를 보고 우주의 비밀을 푸는” 정도의 일과도 같다.
모든 세상사와 만물의 현상을 과학적 원리 같은 것으로 전문적이고 깊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위에서 소개한 이야기에서 중심이 되는 건 그런 노력이 상상할 수 있는 세계의 면적을 확장시킨다는 점이다. 곧, 인식의 토대를 그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쪽으로 이동시키는 일이다.
넷플릭스 영화 '나의 문어 선생님'
<나의 문어 선생님>에는 비영리단체 ‘Sea Change Project’의 설립자이자 박물학자,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크레이그 포스터가 출연(그는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한다. 케이프타운 인근 만의 다시마숲에서 프리 다이빙을 하던 그는 어느 날 암컷 왜문어 한 마리를 만난다. 처음 만난 문어는 조개껍질 같은 것들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는 매일 바다로 향하며 카메라와 함께 문어의 일상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동물과 형성되는 유대 관계를 다루거나 묘사한 영화를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나의 문어 선생님>을 돋보이게 하는 건 크레이그 포스터가 문어를 보러 바다에 향하는 내내 문어와 관련한 여러 논문들을 샅샅이 읽으면서 ‘공부’한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조개껍질이나 해초 등을 모아 자기 몸을 감싸는 것이나 몸 색깔을 주변과 비슷하게 변화시키는 것, 바위 밑으로 숨는 것 등 문어가 자신을 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행하는 행위들의 비밀을 알아간다. 문어가 생존 방식을 세대를 거듭해 진화, 터득하며 꽤 잡기 힘든 해양생물 중 하나로 꼽히는 점을 상기하며 크레이그와 카메라는 문어가 자신을 경계하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마치 이 관계가 무엇인지 알아가겠다는 듯, 문어가 자신의 ‘선생님’이 될 것을 이미 예감하고 확신했다는 듯 탐사를 멈추지 않는다.
크레이그는 문어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하면서도 쉽사리 벽을 허물지 않는다. 문어가 상어와 같은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등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그는 개입을 고민하면서도 오랜 세월 지속된 생태계의 작동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문어를 지켜보며 느끼는 크레이그의 감정을 <나의 문어 선생님>의 카메라는 생생하게 포착한다. 다큐멘터리 제작자답게 그의 카메라는 직접 접하기 힘든 다시마숲 연안의 식생을 가까이에서 포착하면서 세계에 흥미를 느끼는 학자의 호기심과 문어를 지켜보면서 생겨나는 애착을 동시에 놓치지 않는다. 이것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 중심의 낭만 같은 것이 아니라, 곧 진심으로 선생이라 여기는 문어와의 우정이다. 문어가 자신의 다리를 크레이그의 몸에 가져다 대는 모습은 충분히 그것이 단순한 동물적 행동이 아닌 친밀한 우정의 형성이었음을 의심하지 않게 만든다.
넷플릭스 영화 '나의 문어 선생님'
<나의 문어 선생님>은 문어의 일생을, 외부자의 시선 대신 문어의 생각을 진정 이해하려는 노력을 담아 관찰하는 동시에 함께한다. 짝짓기를 한 뒤 알이 무사히 부화하기까지 제 몸을 희생해 보호하는 문어의 결심. 상처 난 자리에 새로운 살을 돋도록 하는 문어의 인내. 그러한 것들을 탐구하는 크레이그의 여정은 곧 ‘메타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문어의 생각을 생각하는 일, 곧 문어에 이입하는 일. 그건 어느 동물이든, 어느 식물이든, 그리고 어느 누구를 향해서든 일어날 수 있다.
생태계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종을 전혀 해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건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만 스스로만이 중심이 되는 세계관을 벗어나 다른 종에 대해, 가보지 않았던 세계에 대해 애정 어린 호기심을 갖고 생태적 관점에서 탐구해 나가는 정신을 잊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이 세계가 조금씩 선순환할 수 있지 않을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오랜 영화제작에 지쳐 있었던 크레이그 포스터에게 낯선 문어와의 조우가 일 년에 걸쳐 매일 그를 바다로 향하게 만들었듯, 세계의 경계를 확장해 나가는 여정은 스스로는 물론 그것을 접하는 누군가를 변화하거나 행동하게 이끈다. 그것이 한 마리 문어를 ‘선생님’이라 칭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