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2023)이 ‘아이들’의 세계를 지켜내는 방식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괴물>(2023)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속 ‘아이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을 마주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사정으로 일상의 격변을 겪는 과정에서 또래들보다 일찍 성숙하게 된다. 그건 원하거나 짐작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일어나는 성장이거나 혹은 적응하거나 살아남기 위한 과정에서 스스로 내리는 선택이다. <걸어도 걸어도>(2008)에서 ‘아쓰시’(타나카 쇼헤이)는 학교에서 죽은 토끼를 위해 반 친구들이 다 같이 쓰는 편지에 대해 어차피 읽어줄 토끼가 이제 없는데 그 편지가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라는 이야기를 새아버지인 ‘료타’(아베 히로시)에게 들려준다). 친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재혼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그는 상실과 그 의미를 일찍 경험했다. <어느 가족>(2018)에서 ‘쇼타’(조 카이리)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함께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행위에 익숙해졌지만 후반부 어떤 장면에 이르러 (‘쇼타’와 함께 다니면서 보고 배웠을) ‘유리’(사사키 미유)가 마트에서 과자를 훔치려 하자 마트 직원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기 위한 소란을 일으킨다. 비록 혈연으로 맺어져 있지는 않지만 함께 살며 그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거나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유리’가 (영화의 원제처럼) ‘만비키(도둑) 가족’이 되지는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의 ‘스즈’(히로세 스즈) 역시 부모의 상실과 재혼을 통과하며 흔히 떠올릴 ‘아이다운’ 모습의 전형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로 작중 이복언니인 세 자매들과 새로운 의미의 가족을 이루며 살게 된다.
일찍이 “작가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부자유를 받아들이는 존재”(『걷는 듯 천천히』, 이영희 옮김, 문학동네, 2015, 34쪽)라며 “부자유를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감각”에 대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서술한 바 있다. 이는 다큐멘터리 방송사의 프로듀서로 경력을 시작한 스스로의 작품 세계에 대한 주석의 일부이지만 마치 그의 영화 속 ‘아이들’은 주어진 세계와 당면한 환경을 나름대로의 의미로 해석 및 체화하는 과정에서 또래들보다 먼저 성장하기를 강요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일찍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에 이른, 어떤 의미에서의 ‘작가들’처럼 비친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가 어른의 세계 안에서 미성년을 묘사하는 방식은 거의 모든 필모그래피 안에서 흥미롭게 읽힌다.
한국에서 한국의 배우들과 스태프들과 함께 작업한 <브로커>(2022)가 126만 명의 국내 관객을 동원했고 최근에는 장편 데뷔작 <환상의 빛>(1995) 이후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각본을 자신이 쓰지 않은 <괴물>(2023)도 53만 명의 국내 누적 관객 수를 기록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국내에서 현재의 일본 영화감독 중 돋보이는 정도의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그의 연출작들이 대부분 4만 명 대 ~ 10만 명 대 전후의 누적 관객 수를 기록해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프랑스(<파비안느에 관한 진실>(2019))와 한국을 오가며 작품을 연출한 뒤 다시 본국인 일본으로 돌아와 선보인 <괴물>의 한국에서의 흥행은 꽤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여겨진다. 이미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일본의 거장 감독 중 한 명임에도 국내에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이름이 다양성 영화 소비 관객층에게나 각광받는 정도의 위치에 있어왔다고 일단 말해보겠다. 그렇다면 송강호, 강동원, 이지은 등과 같은 한국의 톱스타들과 함께한 <브로커>의 경우와는 달리 <괴물>은 그 소재와 연출 방식 등 여러 측면에서 한국에서 상업적으로 일정 이상의 성과를 거두기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 앞서 말한 수 만 명 대의 관객을 동원할 법한 영화였다는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필모그래피에서는 더 의미 있는 분기점으로 다가온다. 이미 그에 대해 평가하고 분석해 온 수많은 감독론 내지 작가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정한 경지에 이른 완숙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이름에 대해 더 많은 할 이야기가 있다는 점을 <괴물>을 통해 상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특히 <괴물>이 결말을 맺는 방식과 이 영화 속의 아이들, ‘무기노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와 ‘호시카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에 관해 살펴보는 일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아닌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임을 감안하더라도) <괴물>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고 스토리텔러로서 그가 추구하는 방향을 가늠하게 할 어떠한 지표가 될 것인지에 관해 돌아볼 계기가 될 것이다.
먼저 영화의 결말 이야기부터 해볼까. <괴물>의 끝맺음은 모호하다. 여기서 모호하다는 말은 연출 방식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매체 인터뷰에서의 언급을 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도 사카모토 유지도 ‘미나토’와 ‘요리’가 폭풍우로부터 생존했음을 상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일련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혹은 영화가 아이들에게 ‘부여’한 일종의 가상의 행복인지 등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만큼 분명하게 지시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폭풍우로 인한 산사태로 차량과 인명 출입이 통제된 산속에서, ‘미나토’와 ‘요리’가 둘만의 아지트로 삼고 있던 낡은 폐기차에도 빗물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세찬 비바람과 토사 속에서 폐기차는 원래 있던 모습에서 90도로 쓰러진 채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다행히 폐기차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인근 배수로와 맞닿은 덕분인지 기차 안이 물에 잠기거나 하지는 않은 모습이다. 그렇지만 구성상 영화의 2부 후반부에 해당되는 장면에서 ‘미나토’의 어머니 ‘사오리’(안도 사쿠라)와 5학년 2반 교사 ‘미치토시’(나가야마 에이타)가 기차의 (이제는 천장이 된) 창문 부분의 틈을 열었을 때, 아이들은 이미 거기에 없다. 곧이어 같은 상황을 다룬 3부 후반부에서 아이들은 배수로를 기어서 빠져나와 바깥으로 올라온 뒤, 풀숲을 지나 앞서 목격했던 철교를 향해 달린다. 앞선 장면에서 철교는 이제 기차가 다니지 않고 있었기에 분명히 외부인의 출입이 차단되어 있었지만 ‘미나토’와 ‘요리’가 달려갈 때 그곳에는 앞을 가로막는 철문이 없다. 아이들이 임의로 넘어갈 수는 없었지만 강한 비바람으로 인해 결국 철문이 뜯겨 나갔던 것일까. 2부에서 ‘사오리’와 ‘미치토시’가 아이들을 찾아 폐기차에 도달했을 시점에는 비가 강하게 쏟아지고 있었으나 두 아이들의 시점인 3부 후반에서 ‘미나토’와 ‘요리’가 기차를 벗어나 배수로를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할 무렵에는 (더군다나 바로 직전 컷이 ‘사오리’와 ‘미치토시’가 안전 요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산속으로 아이들이 있을 곳을 향해 나서는 장면이었기에) 이미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의 장면인 것처럼 날이 갠 듯 보인다는 점에서 컷과 컷 사이 시간의 흐름도 의도적으로 분절되어 있다. 한편 배수로를 빠져나온 뒤 바깥공기를 마시며 한껏 소리 지르며 달리는 두 소년의 뒷모습과 함께 비치는 햇살은 그간 영화에서 목격했던 장면들과는 달리 이질적으로 밝고 눈부시다.
이는 타당한 해석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비롯된 짐작에서 출발해 영화의 결말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함의가 있다고 판단한다. 영화 내내 ‘어른들’은 ‘미나토’와 ‘요리’의 사정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거나 오해한다. 또한 선의에서 비롯되었을 도움의 손길이나 관심조차도 결국은 아이들의 입장을 정확히 헤아리지 못하는 쪽으로 귀결된다. 당장 ‘미나토’의 어머니 ‘사오리’는 ‘미나토’가 교사의 체벌 내지 누군가로부터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라 확신한 채 ‘미나토’를 여러 차례 추궁하고는 결국 학교를 찾아 교장과 교직원에게 항의한다. 별다른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는 아들의 작은 행동(가령, 식탁 밑에 떨어진 지우개를 줍기에 앞서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가만히 멈춰 있는 모습)에 대해서조차 그는 일일이 의미를 부여해왔을 것이다. 사실은 ‘미나토’가 자발적으로 운동화 한 짝을 ‘요리’에게 빌려주었을 뿐인 데도 이 또한 당연하게도 ‘사오리’는 알 리 없었다. 더군다나 아이들에게 ‘호리 센세’로 불리는 ‘미치토시’는 소란을 말리려다 의도치 않게 ‘미나토’에게 코피가 나게 하기도 했고 결국 정직 처분을 받은 뒤 찾아간 학교에서는 ‘미나토’를 추궁하는 듯한 모양새로 ‘미나토’가 겁에 질리게 해 자리를 피하게 만들기도 했으니, <괴물> 속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특별한 도움을 주기는커녕 아이들의 내면에 의도치 않았더라도 생채기를 내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 속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렇다. 그렇지 않거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이는 어른의 경우는 뒤에서 잠깐 서술하기로 한다.)
다시 말해서 ‘미나토’와 ‘요리’의 입장에서는 자연재난의 상황에서도 어른들의 손길에 의존하려 하지 않았을 개연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자연으로부터의 재난의 와중에서도 두 소년은 어른들로부터의 자연재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움(구조)조차도 원치 않았거나 선뜻 구조되기를 망설였을 것으로 (2부 후반에 기차 안에서 마치 아이들의 숨소리처럼 들리는 듯한 사운드에서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는 점. 게다가 두 소년은 이제 막 퀴어 정체성을 확인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거나 깨달았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혼란해하던 중이었으므로, 그리고 ‘요리’의 아버지는 ‘요리’가 병에 걸린 것처럼 간주하고 학대하며 할머니 댁으로 보내려 했고 ‘미나토’의 어머니는 사회적인 의미의 ‘평범한 (이성애자) 가정’을 ‘미나토’에게 반복적으로 주입하며 과잉된 보호를 하고 있었으므로, ‘미나토’와 ‘요리’ 두 사람 모두에게는 오직 지금 생겨나는 마음의 원천인 서로의 존재만이 중요할 뿐 어른의 손길이 구태여 절실한 건 아니었으리라. 각자에게 닥쳐온 마음의 재난 아래에서 자연의 재난은 마음의 격랑과는 별도의 층위에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고 하기보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련의 커다란 환경이었을 따름이겠다. 그들은 지금 스스로의 마음과도, 추궁하거나 간섭하려 하거나 과잉 보호하려는 어른들과도, 그리고 태풍과도 싸우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미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당면해 있는 여러 환경적인 요인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거나 감당하려는 중이었으므로 그것이 인간으로부터의 재난이든 자연으로부터의 재난이든 출처는 크게 중요치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결국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남기를 택했다. 누군가(어른들)로부터의 구조 없이. 앞으로 어떤 난관이 닥쳐오더라도, “다시 태어나거나 그런 일은 없는”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그 무언가로 “다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두 사람에게 남은 건 각자와 서로의 마음을 돌보고 보듬는 일일 뿐, 타인으로부터 가해지는 어떤 판단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세계는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도 그 안의 인물들이 (영화가 시작될 때와는 다른)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변화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라 충분히 믿어지는 세계이므로, “영화관을 나온 사람으로 하여금 영화 줄거리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내일을 상상하고 싶게 하는 묘사”(고레에다 히로카즈, 앞의 책, 120쪽)로 가득 찬 세계이므로, 관객들을 포함한 누군가 ‘괴물’을 찾는 데에 골몰할 동안에도 ‘미나토’와 ‘요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점차 성장해 나갈 것이다. 끊임없이 마음에 상처 입히는 현실의 과제와 시련이 다가오기도 하겠지만 둘은 굴하지 않고 아지트를 함께 지켜내려 하겠다. 은하철도로 만든 폐기차 한 칸이 폭풍우로 유실되었겠지만 햇살 아래에서 이제는 새로운 둘만의 공간을 그 어디에서든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다른 방식으로도 말할 수 있다. 일찍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또 다른 영화 <세 번째 살인>(2017)에서도 관객들은 끝까지 사건의 진실(즉 살인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과 그 내막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여러 정황과 추측들 가운데 오직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와 피의자 ‘미스미 타카시’(야쿠쇼 코지)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통해 각자가 믿는 진실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영화는 보여주었다. ‘시게모리’가 왜 ‘미스미’를 믿기로 했는지, 과연 ‘미스미’가 정말 공장 사장을 죽인 진범이 맞는지 <세 번째 살인>은 결론 짓지 않는다. <세 번째 살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괴물> 또한 하나의 현상 내지 사건을 두고 관계되어 있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진실’이 존재하고 그것은 단일한 사실을 넘어 모두에게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인물들의 발화를 통해 말하면서도 동시에 영상 연출을 통해 보여준다. <세 번째 살인>이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법정 드라마이자 스릴러였다면 <괴물>은 3부에 걸친 구성을 통해 여러 버전의 ‘진실’이 존재한다는 점은 물론 세 번째 이야기에 이르러 어른들이 간파하지 못하는 ‘미나토’와 ‘요리’ 사이의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하나의 (“아이들은 폭풍우로부터 무사히 살아남았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의) 해답보다는 영화(의 연출자와 각본가)가 믿는 진실 혹은 ‘미나토’와 ‘요리’ 각자 그리고 함께 믿는 진실이 인물의 내면을 향한 이해에 다가서는 데에 더 유의미할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전작들에서 대부분 아이들이 처한 상황과 환경의 변화는 어른들 혹은 타의로부터 이루어졌지만 <괴물>에서 어른들은 내내 오해(그나마 ‘미치토시’가 장래희망에 대해 쓴 두 아이들의 글을 통해 어떤 이해에 다가서지만)하거나 판단하려 할 뿐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변화를 주거나 동조받지 못한다. 오히려 어른들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환경의 일부가 될 뿐이다. 아이들은 어른의 도움을 받지 않기를 선택했으니까. 폐기차 안에 서로만이 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고 마치 누군가의 틈입을 방지하려는 듯한 신호 체계와 통신 수단(“나 있어”라고 쓰인, 움직이면 소리가 나는 팻말 등)도 마련했으니 이 공간에는 누구라도 쉽사리 끼어들 수 없다. 요컨대 어른들이 아이들을 재난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은 영화가 추구하는 바와 맞지 않는다. 그나마 ‘미치토시’는 ‘미나토’가 잘못하지 않았다며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며 사과하지만 그것은 ‘미나토’에게도 ‘호리’에게도 전달되지 못한다. ‘사오리’는 끝내 아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영화의 끝에서 아이들이 부모나 교사와 재회하지 못하는 건 어른들이 사실이 아닌 진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거나 깨닫기에는 늦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괴물>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많은 전작들과 달리 범죄 등 사회 문제를 서사를 작동시키는 핵심 요소로 전면적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은 작품으로 보인다. 학교 폭력이나 집단 따돌림 등이 등장하지만 소위 한 사건에 대해 그 가해/피해를 가리거나 그것을 사회 구조적인 어떤 문제로 환원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보다 중요하게 작용하는 건 어른들은 미처 파악하지 못하지만 ‘미나토’와 ‘요리’ 둘 사이에서 고요히 조금씩 일어나는 관계의 시작과 발전이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리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거나, 표현하지 않거나, 그 새로운 감정에 당황하고 감정을 밀어내려 한다. 그러다가 폐기차 안에 다시 도달한 뒤 바깥에서 들려오는 비바람 소리를 마치 ‘빅 크런치’가 시작되려는, 둘만의 열차가 출발하려는 소리임을 공동으로 확인한다. ‘요리’가 “출발하려는 건가?”라고 묻자 ‘미나토’는 “출발하는 소리야”라고 답한다. 이제 두 사람의 여정이 어째서 시작되었는지를 복기할 차례다.
‘미나토’는 무엇이든 에둘러 표현하거나 혹은 직접 타인에게 발화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표현하는 인물이다. 죽은 아버지의 영정 앞에 케이크를 두고 어머니 ‘사오리’와 함께 촛불을 끌 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나 친구들과의 이야기 등을 ‘보고’하라는 ‘사오리’의 말에 ‘미나토’는 “입 밖으로 말하면 엄마가 듣잖아”라고 반응한다. ‘사오리’가 자리를 피한 뒤 ‘미나토’가 작게 내뱉는 말은 “난 왜 태어났어?”다. ‘엄마’가 듣지 못하도록 말하는 건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부모에게도 꺼내기 어려운 종류의 이야기라서다. 집에서 자기 머리카락을 왜 잘랐는지에 대해서도, 어쩌다 운동화를 한 짝만 신고 집에 돌아왔는지에 대해서도, 그리고 “네 뇌는 돼지의 뇌”라는 말을 누가 했는지에 대해서도 ‘미나토’는 ‘사오리’의 의문을 정확히 해소시켜주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되는 ‘사오리’의 추궁에 ‘미나토’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피하거나 거짓말을 한다. 이는 ‘사오리’가 일상적으로 자주 평범한 가족을 강조하면서 “꽃 이름을 많이 아는 남자는 인기가 없다”는 등 여러 방면으로 ‘미나토’가 본심을 꺼내지 못하는 환경을 조성해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흰 선 밖으로 나가면 지옥 간다’ 같은 ‘사오리’의 이야기도 ‘미나토’에게는 (비록 그 순간에는 장난스럽게 넘길지라도) 마치 경계로 내몰아가는 듯한 발화인 것이다. ‘미치토시’에게도 원인이 있다. 악의적이지 않더라도, 그 또한 “남자답게”를 여러 차례 강조한다. 매스 게임을 하다가 2층 대열이 무너져도, 양호실에서 ‘요리’와 화해를 시키려는 순간에도. 그 말은 ‘요리’를 통해 ‘미나토’에게 돌아오기도 한다. ‘미나토’가 폐기차 위에서 ‘요리’가 학급에서 처한 괴롭힘의 문제를 “호리 선생님에게 말해보면 어때?”라고 제안하자 “남자답지 않다는 말만 돌아오겠지”라는 ‘요리’의 체념적인 응답이 돌아온다.
집에서도 ‘미나토’는 피부가 쫀득쫀득하다는 개그를 하는 여장 남자 연예인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본다. ‘요리’와의 관계가 시작되고 진전되는 동안, 스스로도 자기 마음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는 동안 ‘미나토’는 계속해서 사회가 규정한 ‘남자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접한다. 제 마음을 여간해서는 직접 발화하지 않던 ‘미나토’가 변화하는 건 역설적이게도 자신보다 더 주변에 반응하지 않는(발화하지 않는) ‘요리’의 모습을 보면서부터다. ‘몰카’라며 반 아이들이 책상에 쓰레기를 올려놓고 분필 지우개를 털어도, 여자 아이의 얼굴에 난 점을 ‘검정콩’이라고 표현하기를 강요받아도, 등굣길에 그 아이들이 자신을 뒤에서 밀어 넘어뜨려도 ‘요리’는 대꾸하지 않는다. 검정콩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말할 수 없어”라고 말할 뿐이다. 두 사람이 아지트에서 즐겨하는 ‘괴물 게임’에서 나온 나무늘보 그림에 대해 ‘요리’가 “남에게 공격당하면 온몸을 늘어뜨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하자 ‘미나토’는 그 설명에 대한 답으로 “호시카와 요리”를 말한다. 요컨대 그는 ‘요리‘가 괴롭힘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음을 계속해서 관찰해 왔던 것이다.
괴롭힘이 지속되자 그는 ‘요리’ 대신 대응에 나선다. ‘사오리’나 ‘미치토시’가 하는 ‘미나토’에 대한 오해들은 모두 반 아이들이 ‘요리’를 괴롭히는 상황을 멈추게 하거나 무마시키기 위한 ‘미나토’의 우발적인 행동에서 비롯한다. 관심이 ‘요리’에게 집중된 교실에서 ‘미나토’는 교실 뒤편의 실내화 가방과 같은 물건들을 이리저리 던지며 ‘소란’을 일으킨다. ‘요리’가 책상에 뿌려진 물감들을 닦는 걸레가 아이들의 손에 이리저리 옮겨지다가 ‘키다’(이이다 하루네)에 의해 자신에게 돌아오고 그로 인해 자신과 ‘요리’의 관계가 놀림의 대상이 되자 이번에도 ‘미나토’는 ‘요리’에게 다가가 걸레를 빼앗으려 하며 서로 옷에 물감을 묻혀 가며 뒤엉킨다. 아직 자기 마음에 대해서도 정확히 자각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그는 말로써 주장하는 대신 행동으로 ‘요리’를 향한 괴롭힘을 중단시키거나 그 영향을 자신과 분담한다.
‘요리’는 또래들로부터의 괴롭힘을 하루이틀 당한 게 아닌 상황으로 보인다. 그나마 학급 내 여자 아이들이 몇몇 상황에서 도움을 주거나 ‘요리’와 대화하는 모습이 포착되지만 그는 그 어떤 ‘몰카’에도 ‘리액션’하지 않기를 선택한 것처럼 그저 혼자서 견딘다. 게다가 괴롭힘은 학교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가정에서 아버지에 의해서도 지속된다. 가정에서는 “네 뇌는 돼지 뇌”라는 아버지의 언어폭력을 반복적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여겨지며 ‘요리’의 여러 환경과 조건들은 총체적으로 반 아이들의 놀림과 괴롭힘의 대상이 되어왔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를테면 교과서를 낭독하는 그의 더듬거리는 모양까지도 말이다. 더군다나 ‘요리’의 성적 지향은 반 아이들 일부에게 간파되어 왔거나 혹은 시험(‘몰카’)의 대상이 되어온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요리’는 ‘미나토’에 비해 일찍 자기감정의 모양을 깨달은 듯하다. 음악실에 ‘미나토’와 교구를 정리하러 간 장면에서 그는 “올해도 친구가 생기지 않을 줄 알았다”라는 말로 ‘미나토’와의 ‘관계’를 먼저 정의 내린다. 비록 ‘미나토’가 집에 가서 머리카락을 스스로 자르는 반응을 하게 만들었으나 바닥에 떨어진 과자를 줍는 ‘미나토’의 머리를 뒤에서 쓰다듬는 ‘요리’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다.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요리’는 자신이 학교에서 여러 차례 당해왔을 상황처럼 하수구 맨홀 밑에 고양이가 있는 ‘상황’을 ‘미나토’에게 ‘몰카’라며 경험시킨다. 이때 바닥에 머리를 나란히 대고 있는 ‘미나토’와 ‘요리’의 얼굴에 영화 결말부를 제외하면 가장 화창한 햇살이 내리쬔다. 꽃 이름을 많이 아는 남자는 인기가 없다고 엄마에게 들었다는 ‘미나토’의 말에 ‘요리’는 “어두운 걸 무서워하는 남자는 인기가 없다”라며 폐기차가 있는 터널 너머 공간으로 ‘미나토’를 처음으로 인도한다. 할머니 댁으로 가게 되었음을 털어놓는 장면에서 자신의 포옹에 당황한 듯한 ‘미나토’에게도 그는 시종 “괜찮아”라며 이러한 감정이 자신에게는 낯설지 않은 듯 행동한다.
그런 그가 거의 유일하게 ‘미나토’에게 어떤 행동의 주도권을 내어주는 순간은 후반부 아버지의 학대와 폭력으로 욕조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 대목에서야 일어난다. ‘요리’의 집에 찾아온 ‘미나토’가 그를 발견하고 욕조에서 꺼내는 것에서 행동을 그치지 않고, 두 사람이 비를 맞으며 폐기차 아지트로 향하는 순간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미나토’의 주동으로 일어난다. 처음 폐기차가 있는 곳으로 향할 때는 ‘요리’가 앞에 있었지만 이 순간에는 ‘미나토’가 길을 앞서며 사다리를 밟고 올라오는 ‘요리’의 손도 잡아준다. 이와 같은 대목은 그 어떤 학대와 괴롭힘에도 거의 나무늘보처럼 대응하기로 일관하던 그가 딱 한 번 아버지의 강요로 자신의 ‘병’이 다 나았고 할머니 댁이 있는 동네에 좋아하는 여자 아이가 있다는 ‘거짓말’을 하고 이를 스스로 ‘미나토’에게 고백하고 난 뒤에 일어난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한 번도 서로에게 “좋아해”와 같은 직접적인 발화를 하지 않지만 공동으로 겪는 여러 사건들과 각자 겪지만 함께의 것으로 만드는 여러 상황들을 지나 이제 ‘빅 크런치’를 혼자가 아닌 둘이서 맞이하기로 암묵의 합의를 결국 이루어낸다.
지금껏 서술한 것들은 상당 부분 영화의 ‘1부 - 2부 - 3부’를 하나의 서사이자 사건으로 전제한 채 정보를 종합하며 쓴 것들이다. 그렇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편집을 통해 의도적으로 정보를 분산시키고 관객들에게 진실에 몇 발짝 앞까지만 다가서도록 한다. 영화 속 인물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관객이 알고 있을 때 흔히 일컫는 ‘서스펜스’가 생기는데, 그렇다면 <괴물>은 그 서스펜스의 구축이 절정에 다다른 작품이다. 영화 속 그 어떤 어른들도 (관객들은 비로소 영화 후반부에 알게 되는) ‘미나토’와 ‘요리’만이 알고 있는 경험과 관계의 세부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니까 아이들 시점에서 펼쳐지는 영화의 3부는 온전히 ‘미나토’와 ‘요리’ 둘만의 서사다. 시간의 흐름도 가장 느리게 펼쳐지며 진실에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정보의 양도 가장 많다. 관건은 그러한 정보들 상당수가 어른들에게는 공유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영화 속 어른들은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중반 어느 시점까지 그러하기 쉬운 것처럼 진실 자체보다는 그 주변에서 맴돌기 때문이다. 실상 영화 속 어른들은 ‘요리’에게 괴롭힘을 가해하는 아이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듯한 모습을 자주 비춘다. 아마도 그 아이들의 소셜미디어 라이브 방송에서 촉발되었을, ‘호리 선생은 걸스바에 다닌다’라는 소문을 초등학교 교사들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발화한다. 교장의 손녀를 둘러싼 교통사고에 대해서도 비록 영화 중후반에 이르러 사실인 것으로 일부 인물과 관객들에게 밝혀지기는 하나 사고의 가해자가 교장의 남편이 아니라 교장 본인이었다는 ‘소문’도 어른들 사이에서 공유된다. 어른들은 지역 사회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아이들을 진정으로 보호하거나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섣부른 판단을 토대로 아이들을 추궁하거나, 아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소문들을 확산하게 하는 데 일조한다.
그나마 변화의 가능성을 보인 건 교장과 ‘미치토시’ 둘 뿐이다. 교장은 영화에서 총 세 번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브라스 연주를 ‘미나토’에게 경험시키며 말하기 어려운 어떤 것을 불어내도록 해줄 뿐 아니라 행복은 몇몇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쓰이는 단어라는 일깨움을 준다. ‘미치토시’는 하지 않은 가해를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그 반대급부로 ‘미나토’를 추궁하고 오해하지만 결국 자신이 잘못 판단했음을 늦게나마 깨닫는다.
<괴물>이 지금과 같은 결말로 이야기를 맺게 된 건 거의 필연적이다. 저마다의 (서로 다른 버전의) 진실들을 펼쳐놓은 뒤 하나의 사실을 각 인물들이 공유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서사적 갈등을 봉합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귀결시킨다면 이 영화가 선사하려고 했던 아이들의 세계는 등한시 된 채 가족과 지역 사회의 화합이라는 전형적인 이야기로 향했을 것이다. 재난이 발생하면 우리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화재가 진화된 뒤 그 잔해는 연기와 재를 남긴다. 태풍이 지나간 뒤 그 자리에는 흙탕물이 뒤덮인 채 퀴퀴하게 젖은 물건들과 때 입은 옷가지들이 남겨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나토’와 ‘요리’에게 닥쳐온 재난은 서사의 힘에 의해 봉합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어른들의 입장과 거리를 둔 채) 가만히 들여다볼 때 인물이 추구하는 진실의 힘으로 재난 이후의 삶을 생각하게 해줄 따름이다. 수많은 오해를 해소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는지. 그래서 영화는 과연 걸스바 건물에 난 불의 원인이 영화 첫 장면부터 ‘요리’가 들고 있던 라이터 때문인 것인지, 학교를 향해 어느 학부모로부터 온 내용증명은 누가 보낸 것인지 등을 암시만 할 뿐 정확하게 지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말부에서 철교를 막고 있었던 철문의 행방이나 아이들이 폐기차에서 배수로를 지나 바깥으로 나와 다시 햇살을 볼 수 있게 된 ‘경위’와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애당초 정확히 지시할 생각을 <괴물>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결말부에서 ‘사오리’와 ‘미치토시’가 아이들을 구하러 폐기차로 향하는 순간의 날씨와 아이들이 배수로를 거쳐 바깥으로 향할 때의 날씨 사이의 간극도 그다지 이질적이지 않게 다가온다. 욕조에서 정신을 잃은 ‘요리’를 구하러 가는 ‘미나토’의 모습도 이미 자전거의 유무와 복장, 날씨를 미루어 볼 때 마치 이틀 동안 ‘요리’에게 향한 것처럼 시간과 장소를 건너뛴 편집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관객과 영화 속 어른들이 괴물 찾기에 골몰할 동안 ‘괴물은 누구게’라는 놀이를 하고 있던 아이들은 그 누구로부터도 판단되지 않은 채 둘만의 진실에 다가선다. 비로소 열차는 ‘빅 크런치’를 향해 출발할 채비를 마쳤다.
‘귓가에 맴도는 멜로디를 듣고 있을 때
물에 번지는 이름
살아 있자고 했다’
-안미옥, 「아이에게」, 『온』 창비, 2017, 35쪽
“개별 취재에서 기자가 질문하면, “전문가는 아니지만…” 하고 양해를 구한 뒤(이 부분은 대체로 기사에서 편집된다) 나의 사회적 정치적 입장을 되도록 이야기한다. 그로써 내가 만든 영화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깊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를 ‘정치적’이라고 일컬을지 말지는 둘째 치고, 나는 사람들이 ‘국가’나 ‘국익’이라는 ‘큰 이야기’로 회수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영화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큰 이야기’(오른쪽이든 왼쪽이든)에 맞서 그 이야기를 상대화할 다양한 ‘작은 이야기’를 계속 내놓는 것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해 왔다. 그 자세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여기서 새삼 선언해두고 싶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이지수 옮김, 바다출판사, 2021, 259쪽
<괴물>을 통해 이제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진정 ‘작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이 각본을 직접 쓰지 않아도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여러 영화제에서의 수상 소감이나 매체 인터뷰 등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해왔던 말은 여러 외국어로 통역, 기사화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감독 자신이 한 발언의 일부가 확대되거나 편집되어 하나의 주장처럼 게시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특유의 ‘다큐멘터리적 사고’로 일본 사회 안팎의 여러 문제들을 조명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작품의 상당수는 현대 사회에서 변화된 ‘가족’의 의미를 되묻거나 여러 평범하고 미숙한 인간들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드라마였다. 그가 말한 대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왔지만, <괴물>에 이르러서야 진정 그 ‘작은 이야기’가 그가 계속 담아왔던 아이들의 표정과 발화로부터 한 번 더 탄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우리는, 관객들은 계속 누군가를 오해하거나 오독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은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일 때 어쩌면 그 간극은 점차 줄어들 가능성을 내보이고 우리에게 ‘미나토’와 ‘요리’가 영화 끝에서 마주한 것과 같은 이해의 햇살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두 아이들이 맞이한 그 햇살이 너무 짧지는 않기를 바라게 되는 마음을 끝내 갖게 해주는 것. <괴물>이 단지 의도한 건 그것이었을 것이다. 태풍보다도 범람하는 뉴스들이 그 어느 때보다 자극적으로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소비되는 이 시대의 어른들이 후대를 위해 진정 해야 할 것은 오해를 동반한 판단보다 단지 타인을 향한 응원과 연대의 마음을 회복하기 위한, 아이들이 저마다의 악기를 꺼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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