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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l 10. 2024

지금 양치를 잘한다고 인생이 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치과 치료의 고통으로부터

6년 만에 치과 치료를 다시 받고 있다. 전에 다녔던 치과는 (그 자리에 상호명이 다른 치과가 생겼지만) 없어졌고 동네에서 여러 후기 등을 참고해 가며 ‘자연 치아 살리기’를 추구한다는 오래된 치과를 찾은 게 5월 말이었다. (그때 적용한 ‘가지 않을 치과’의 기준은 예컨대 이런 것이었다. 지하철역 출구 광고로 의사 십여 명이 팔짱을 낀 채 자신만만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상단 문구에는 “의식하진정요법” 같은 게 쓰여 있는 치과. 미용적인 의미의 갖가지 것을 권하는 ‘파우더룸’이 있는 치과. 다니는 치과는 그것들을 모두 벗어나는 곳이다.) 두 원장님이 보존치료(신경치료)와 보철치료로 분야를 나누어 맡고 이 동네에서 거의 유일하게 평일 야간진료도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치료 대상 치아 두 개 중 하나에 지난주까지 신경치료와 새 치아 본뜨기를 마친 자리에 새로 제작된 치아를 완전히 부착하기 전 임시 부착을 하고 난 직후다. 다음 주에 치과에 한 번 더 가면 이번 보치료는 끝이다. 나머지 하나는 보존이 어렵고 발치를 해야 하는데, 못 살릴 자연치 하나를 생각하니 아마도 인생에 있어서도 과정에 대한 뒤늦은 이해가 오늘을 만들기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예약일 전날 이렇게 알림 문자가 온다.


미술학원을 다닐 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양치하기를 정말 싫어했다. 특히 저녁에는 더 싫어했다. 그렇다고 반항적이지는 않았어서 결국 억지로 하기는 했다. 스마트폰에 새 지문을 등록할 때 화면에 수치로 등록된 정도를 표시해 주듯이, “지금 당신의 양치 진행율은 79%입니다.”, “우측 어금니 뒤편에 잔여 치석이 있습니다.”, “덜 닦였습니다.” 하고 알려주는 기계라도 있었다면 올바른 양치법으로 제대로 했을 텐데. 세상에 정석적으로 양치를 잘하는 사람들도 그때나 지금이나 많았고 많은 만큼 아무래도 지금 몇 주 째 치과치료를 받고 있는 건 그때 제대로 된 양치를 하지 않았던 내 식후들이 모이고 모인 산물이다.


그때 양치를 싫어한 이유이자 핑계는 이런 것이었다. 어차피 지금 양치해 봐야 자고 일어나면 또 입냄새 날 거고 또 아침밥 먹을 (거고 아침 먹으면 또 양치해야 할) 건데 꼭 양치를 해야 돼? 라든가, 오늘 학교도 안 가고 집에만 있을 건데 굳이 양치를 해야 돼? 같은 것. 거기에 대해 엄마가 날 야단치시며 했던 이야기가 “그럼 어차피 죽을 거, 살아서 뭐 해?”였다. 사실은 “귀찮아서” 안 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유년의 논리는 그렇게 한 번에 뒤집힐 만큼 빈약했다. 엄마의 그때 그 말씀을 지금의 언어로 해석하면 “인생은 결국 다 과정”이라는 뜻이다. 유한하기에 쓸모없는 게 되는 게 아니라 모두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 한계 속에서도 어떤 방식과 과정을 통해 삶을 영위하느냐에 따라 그 죽음은 저마다 다른 층위의 일처럼 기억된다는 것. 지금 양치를 똑바로 해도 내일 아침이 되면 입에서 단내가 나고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실 거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할 일을 누락하거나 유보하는 나날이 쌓이면? 발치해야 한다. 자연치아를 재생하는 기술은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다. 어느 이모티콘에서 봤던 문구인 “허리수술 이천만 원”처럼, “치아 하나 삼백만원” 이렇게 표어라도 하나 만들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양치를 잘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나도 치과에 다니기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전동칫솔을 써보기 시작했고 가끔 치실도 쓴다. 그렇지만 이미 늦었다.


마취하기 직전.


결과 자체가 아니라 과정의 의미를 상기시키고 그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오래도록 문학을 비롯한 문화예술이 해왔던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각난 영화 이야기 한 토막이 있지만 조금 뒤에 쓰기로 하고 그보다 먼저 남길 것은 치과 치료의 과정에 대한 짧은 경험담이다. 대체로 신경치료 등을 위해 마취를 하고 나면 코와 입만 제외하고 얼굴과 목 주위를 천으로 덮는다. 제법 답답함을 준다. 입을 벌리고 가만히 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짧게는 20분 길게는 거의 한 시간. 침을 삼키고 싶어질 때가 생기는 건 물론이고(부분 마취를 하면 침 삼키기가 쉽지 않다) 전문 의료진이 안전하게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만 괜히 혀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큰일 날 것 같아(요즘에는 치료할 치아에만 집중하고 환자 움직임으로부터의 영향을 최소화하고자 입 안에도 천으로 된 작은 장치를 추가로 씌운다) 내내 긴장 상태로 있게 된다. 습하고 더운 날씨 속에 등이나 엉덩이라도 가렵게 되거나 하면 그 입 벌린 시간은 입 안으로 온통 지옥이 들어오는 시간이 된다. 그 자세로 있으면 말도 제대로 못 한다. “스어으이어어으에여.” 선풍기 좀 켜 주세요, 라는 뜻이다. 미리 요구사항을 상정한 수신호 체계라도 만들어야 하나. 방법은 한쪽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심규선 노래도 듣고 에스파 노래도 들었다) 등 평화로운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휴대용 선풍기라든가 한 알 한 알 헤아릴 염주, 혹은 말랑한 인형처럼 손에 뭘 쥐고 있는 것도 좋다. 산은 산이요, 꽥은 꽥이로다... 나는 지금 더 건강한 상태로 거듭나는 중이고 내 옆에 앉아 집중하고 있는 이 분들은 내 카드 결제를 받기 위해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현실적인 마음가짐을 갖는 것도 제법 괜찮다.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곧장 잠이 들 수 있을 정도의 둔감한 사람은 아니다 보니, 나도 치과 치료를 계속 받다 보니 나름대로 요령이 생긴 것 같다.


양치만 결과의 보람이 없는 과정들의 연속적 반복인 게 아니라 청소와 같은 집안일도 마찬가지의 속성을 지녔다. 제대로 시작하면 방 전체를 뒤집어엎어도 끝나지 않는 게 청소인데 한 번 안 하고 미루기 시작하면 금세 생활 공간이 쓰레기장이 된다. 소설가 김연수도 “단번에 명작을 쓰고 싶다면, 시간이 갈수록 방이 깨끗해지는 우주에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라고 쓴 바 있다.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77쪽) 청소 같은 건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거의 모두가 귀찮아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계속한다. (청소가 취미인 사람도 있다던데 나는 일단 아니다.) 자기가 안 하면 누군가를 시켜서라도 하도록 한다. 오늘도 치과에 다녀왔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 이 양치 기록을 쓰는 건 어제 저녁 퇴근 후 관람한 빔 벤더스 감독의 신작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3)의 잔영들 덕분이기도 하다.


https://brunch.co.kr/@cosmos-j/1603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야쿠쇼 코지가 연기한 ‘히라야마’는 도쿄 시부야 지역의 공공 화장실 관리 업체 직원이다. 일정한 시간에 바닥을 쓰는 노인의 빗자루 소리과 함께 새벽에 일어나 ‘양치’와 세안을 하고 화분에 물을 준 뒤 유니폼을 입고 현관문을 나서기 전 지갑이나 열쇠 등 소지품을 챙긴다. 주차장 옆 자판기에서 커피 캔 하나를 뽑아서는 카세트테이프로 루 리드나 더 스미스, 니나 시몬 등의 음악을 들으면서 운전해 출근한다. 정해진 동선에 따라 곳곳의 화장실들을 청소 및 유지 관리하고 (중간에 공원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하늘과 나무의 색을 관찰하고 필름카메라로 풍경 몇 장을 담는다) 퇴근 후에는 목욕탕에 들른 후 단골 술집에 갔다가 집에 와서 헌책방에서 산 영미 문학을 읽는다. 꼭 짐 자무시의 <패터슨>(2016) 속 ‘패터슨’스러운 일과를 충실히 보내는 사람. 히라야마는 요컨대 ‘이 사람이 없으면 도쿄 시부야 인근 화장실들은 다 똥밭이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만한 ‘화장실 청소 장인’이다. 어차피 금방 더러워질 텐데 무엇 하러 그렇게 열심히 청소를 하냐는 젊은 동료 직원의 말에도 그는 그냥 웃어넘긴다. (그 직원은 얼마 못 가 무단으로 일을 그만둔다.)


히라야마가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그 전사는 다뤄지지 않지만 영화 안에서 그는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다. (시각적으로는 그림자를 한 손바닥으로 만들든 두 손바닥을 포개어 만들든 그 색상 내지 진하기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는 누군가와 그림자를 밟는 놀이를 하다가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면 이상한 일”이지 않겠느냐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행동을 행함으로 인해 그 이전과는 나날이 다른 사람이 된다는 어떤 진리를 진심으로 아는 사람임을 내비친다. 그러니 그는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사소하거나 하찮아 보이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사람인 것이다. 비슷한 듯 다른 듯 반복되는 평일의 꾸준한 일상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뜻하는 ‘코모레비(こもれび)’에 빗대 예찬하는 <퍼펙트 데이즈>를 보면서도 나는 양치란 이를 청소하는 일이고 어릴 때부터 양치 장인으로 거듭났다면 이렇게 치과를 들락거려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양치를 잘한다고 누가 돈을 주지는 않지만 이가 안 좋아서 돈을 쓰는 일을 줄여주니까.


7월의 어느 퇴근길.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자면 일생의 리듬이나 운율도 특별한 재주가 있어야만 쓰는 게 아니라 단지 매 순간의 지나감과 반복에도 의미가 없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매일 빚어내는 언어로 조금씩 서서히 쓰여 가는 것이겠다. 나름대로 ‘천천히’와 ‘꾸준함’의 가치를 모르지는 않는 사람이라고 자평해왔지만 이런 일상에서도 하나씩은 배우게 된다. 별 다른 의식 없이 양치를 하거나 양치를 하고 나서 야식을 먹거나 혹은 시간에 쫓겨 가글 제품으로 입안을 대충 헹궈내는 순간들도 또 있겠지만, 이렇게 3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접어드는 여름 중턱에도 조금씩은 성장하는 중이다. (202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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