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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28. 2019

써서 기록하는 사람의 나머지 p.

10,907일 - 첫 번째 하루

01.


태어난 지 10,907일째 되는 날, J의 가을은 끝났다. 아니, 이 세상의 가을은 적어도 한 달은 남았지만 적어도 내 가을은 이제 없다, 라고 J는 그날 생각했다. 대개 20대에 첫 연애를 시작해 두세 번의 이별을 경험한, 30대 초반을 맞이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어느 정도는 사랑을 제법 경험해 보았다고 여길 것이다. J 역시도 그랬고, 가을을 맞이할 무렵의 J 역시 그리하여 '이제 다시 사랑이 오고 있구나' 하고 직감했다. 그런 사람이 이제는 없으니 J에게는 자신의 가을이 끝난 것이다. 실제로 바깥은 추워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겨울이라고 생각했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라는 핑계를 계속 대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두 달 전 노트 앱에 끼적인 문장이 J의 눈에 띄었다. J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는 걸 싫어했다. 기록은 그래서 시작했다. 커피가 맛있었던 곳. 인상적이었던 영화, 그 사람과 함께 나눈 대화, 다음에 만나면 이 말을 해야지, 하고 적어놓은 메모들, 처음 누군가를 만난 날짜, 기록의 범위는 그러니까 거의 모든 것이었다. 완벽하게 모든 걸 빼놓지 않고 기억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에 대하여 그것을 잘 기억해두려 노력하지 않으면 그 소중함이 퇴색된다고 믿는 사람. 자신의 기록에 담기는 내용들과 그것들을 자신이 기록한다는 것, 그 행위가 곧 미래의 조금 더 나은 자신을 만들 것이라고 믿는 사람. J는 기록, 특히 글을 쓰는 일에 대해 확고했다.


"당신이 사사건건 남기는 기록이 내게는 버거워요."


그리고 거기 내 사생활에 해당하는 내용들도 있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고 그 사람은 덧붙였다. 서로의 취향과 관심사가 아주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세상을 바라보는 결이 비슷하다고 믿었던 사람. 몇 달 전 직장을 그만둔 J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았고, 삶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바는 확고했지만 현재가 그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것이라 담보해주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 내 불투명한 장래에 미래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줄지도 몰라. 당장 현재의 모습보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걷고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지 그 뜻을 헤아려줄지도 몰라.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연히 같이 공연을 보게 되었던 날. J는 그 사람을 한 번 더 만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영화를 보았다. 다시 한 번 더 만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좋아하는 카페를 소개해주고 산책을 했다. 한여름이었다면 조금만 걸어도 J의 이마는 손수건을 필요로 할 터였지만 가을 무렵의 날씨는 조금 오래 걷기에도 적합했다.


그만 생각하자. 어차피 머릿속에 한동안 남아 있을 테니 지금 굳이 꺼내지는 말자. 출근하는 사람처럼 집을 나선 J는 책과 커피, 술을 파는 동네 살롱에 들렀다. 거의 갈 때마다 반드시 앉는 바 자리가 비어 있었다. 가방에서 시집 한 권을 꺼내고 흑맥주 한 병을 시켰다. 손님이 드문 시각. 주인은 책을 읽고 있었다. 시집이었고, J도 가지고 있는 시집이었다.


'사라진 건 다시 오지 않을까?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건 아름다울까?'*


살롱 주인이 읽고 있는 시집에 실린 어느 시구를 J는 마음속으로 읽었다. J는 한 번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면 사물이든 사람이든 쉽게 그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기억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고, 확실히, 기록하는 일에도 도움이 되었다. 책을 펼치지 않고도 머리로 암송할 수 있는 시구가 있다는 것에 대해 J는 나름대로 자랑처럼 생각했던 적이 있다. 어떤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그런 것도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부분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사라진 것에 관한 시를 떠올리는 건 적어도 그 사람이 자신의 곁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오늘은 J가 태어난 지 10,930일째 날이었다. J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지만, 누군가 "다음 사람은 언제 만날 건가요?" 같은 질문이라도 한다면 "만나지 않을 거예요"라고 답할 수 있을 만큼 혼자의 시간에 완전히 적응해가고 있었다.

 

'10,907일' 이후 며칠간은 펜과 노트를 꺼내지 못했고 노트북으로도 무언가를 타이핑하지 못했다. 스마트폰으로도 음악을 듣거나 영상 콘텐츠를 보는 등 글쓰기를 필수로 하지 않는 일들만 했다.


'내 세계를 다시 단단하게 만들자.'


'시인의 말'이 적혀 있는 시집의 다음 페이지에 펜을 꺼내 이렇게 적었다. 밤 11시 27분. 맥주를 다 마신 J는 도보로 10분이 소요될 거리를 15분 걸어 집에 들어왔다. 청소나 빨래와 같은 몇 가지 집안일들을 처리하고 난 J는 심규선의 노래를 들으면서 잠을 청했다. J는 너무 조용한 곳에서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박시하, '꿈 - 현에게' 부분, 문학동네 시인선 080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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