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를 만나는 날이 주는 소중한 경험이란 바로 이런 것이기도 한 게 아닌가 싶었던 오후. 씨네큐브 광화문에서는 내 온라인 강의(클래스101+)를 들었다는 분이 인사해 주셔서 짧게 대화했다. 글쓰기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는 성함을 여쭈었다. <퍼펙트 데이즈>(2023)를 재관람하고 난 뒤 이어진 야쿠쇼 코지 배우와 송강호 배우의 말들은 유쾌하면서도 자신의 직업에 수십 년 간 매진해 온 이들만의 관록과 무게감이 전해졌다. 긴 문장도 현장감을 자연스럽게 살리면서 최대한 신속하게 관객에게 실어 나르고자 하는 동시통역사 님의 쉼 없이 움직이는 펜과 노트는 물론, 영화의 여운을 연장하면서도 게스트의 솔직한 생각도 이끌어내는 김소미 기자님의 진행도 언제나처럼 좋았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퍼펙트 데이즈>가 좋았던 건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도시의 관객들에게 쉼과 여유를 안겨주는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매 순간의 '코모레비'를 담는 데 충실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서사를 뒤흔드는 사건을 부여하지도 무겁고 심각한 갈등 구조를 전개시키지 않아도 이야기는 작품에 그치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고유한 방식으로 대변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전사를 거의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영화의 언어에 충실해진다. 내레이션도 인물의 직접 발화도 플래시백도 아닌, 오로지 (각본에 직접 명시되어 있지 않은) 배우의 표정을 통해 재현된 매일 새벽의 미소와 이따금 글썽거리는 눈빛 같은 것들이 그 자체로 캐릭터를 완성한다. 인물이 말을 아낄 때 영화 속 카세트테이프 등을 통해 삽입된 음악들이 대신 말해주기도 한다.
*문득 도쿄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가본 해외 여행지(뉴욕, 홍콩, 오사카)도 모두 대도시뿐이다. 잘 정비된 인프라와 문화생활 여건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현지인들 틈에 섞여 일상을 보내는 일이 여행의 경험을 만끽하는 수단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를 볼 때 그 영화 속 공간은 마치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도 인물들이 그곳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을 것으로 믿어지는 세계가 되기도 한다. (송강호 배우는 도쿄 여행 중 만난 어느 공원에 대해 야쿠쇼 코지 배우에게 영화(<퍼펙트 데이즈>) 속 그 공원이 맞는지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국내 포스터
*이 영화에 대해 더 긴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동안 거의 기계적으로 일정한 분량과 형식의 '리뷰'를 썼다. 아직 공개된 곳에 업로드하지 않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2023)을 보고 모처럼 1.5만 자 정도의 긴 글(비평이기를 시도했으나 어쩌면 리뷰에 가까운)을 썼는데 근래에 긴 영화 글을 많이 쓰지 않았던 게 한편으로 그만큼 '좋은 영화'를 많이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더 글 쓰고 싶은' 영화를 많이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퍼펙트 데이즈>는 얼핏 소품 같기도 하지만 매 장면 좋은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다. 야쿠쇼 코지 배우는 (약간 농담처럼) 이 영화를 다섯 번 보면 더 깊은 이해에 가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 것 같다. (2024.07.21.)
2024.07.21 @씨네큐브 광화문
덧붙이는 이야기: 야쿠쇼 코지의 <세 번째 살인>(2017)에서의 연기도 참 좋았다. 직접 발화되는 정보가 영화에서 중요할 때도 많지만, 진정 훌륭한 영화 언어는 많은 경우 간접적인 데에서 나오는데 그게 이를테면 배우의 표정이다. <퍼펙트 데이즈>의 각본은 대체로 인물의 표정이나 행동을 직접 지시하지 않는 쪽으로 쓰였는데 결국 관객이 본 <퍼펙트 데이즈>는 상당 부분 야쿠쇼 코지에 의해 현장에서 탄생한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