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신작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 리뷰
얼마 전 문학동네의 '프리미어 신작 감상회'에 감사하게도 초대를 받아 소설가 김애란의 출간 예정 신작(이 글을 쓰는 오늘 예약주문한 책의 배송을 받았다)을 조금 미리 읽어볼 수 있었다. (8월 9일, 한남동 '블루도어북스'에서) 페이지가 넘어가는 내내 뒷 이야기를 궁금하게 여기게 되면서도 이 책이 끝나지 않고 이야기가 계속되었으면 하고 아쉬움 속에 마지막 장을 덮었던 저녁. 그로부터 불과 며칠 전 독서모임에서 김애란의 단편집 『달려라 아비』를 함께 읽고 대화 나누었던 터라 더욱 생생했던 소설가의 문장들. '역시 김애란' 하는 탄성과 여운이 절로 나왔던 오랜만의 장편을 읽었던 처음의 잔영을 이렇게 기록해 둔다.
"지우는 만화 속 '칸'이 때로 자신을 보호해주는 네모난 울타리처럼 여겨졌다. 둥글고 무분별한 포옹이 아닌 절제된 직각의 수용."
인물에게 연민하지 않으면서도 인물과 그의 삶이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작가의 시선이 내내 이야기의 세부를 낱낱이 보듬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중 하나는 거짓말』(문학동네, 2024)을 읽으며 『달려라 아비』와 『바깥은 여름』의 특장점들을 골라 합쳐놓은 장편이 아닐까 생각했다. 세 인물(지우, 채운, 소리)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작중 만화카페에 업로드되는 만화와 엄마의 편지 등이 중요한 순간마다 접속사처럼 더해지며 읽는 내내 마음을 건드린다. 그렇게 누적된 감정이 결말부에 이르러서 더욱 빛을 발하는데, 『이중 하나는 거짓말』의 진실한 감동은 바로 그 서사를 마무리하는 방식에서 오는 것 같다.
요컨대 갈등을 해소하거나 사건의 전개를 종결하는 일로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게 아니라, 순간의 대화와 서술을 통해 기꺼이 진실을 감당하기로 용기를 내기로 한 인물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걸음(여정)을 내딛는 순간 (여름을 지나고 시작되는 겨울과 함께) 매듭지어짐으로써 마치 이들의 삶이 소설 밖에서도 계속될 것임을 지시하는 듯했다.
이 소설의 결말(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두 사람)을 보며, 밀드레드/윌러비/딕슨 세 사람 사이의 오해 뒤의 이해와 연대를 내비치는, 마틴 맥도나의 영화 <쓰리 빌보드>(2017)의 마지막을 잠시 떠올렸다. <쓰리 빌보드>의 마지막 대사는 인물들이 확신 없는 결정을 내린 채 어디론가 떠나면서 내뱉는 "가면서 결정하자고(I guess we can decide along the way)"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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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그림을 그릴 때도 소리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손끝에서 무언가 새로 태어나는 듯한. 비록 큰 변화는 아니나 이따금 가슴에 바람이 불고 볕이 드는 기분이었다. 운이 좋다면 상대의 마음에도 옮길 수 있을 것 같은 미풍이었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속, 조수석과 운전석에 각각 앉은 지우와 선호도 '일단' 차에 몸을 실은 상태다.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뭔가 대단한 일이 펼쳐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가 지우를 생각하며 용식의 시점에서 "이미 아는 걸 한번 더 알려주"는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듯,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 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성장임을 지우가 생각했듯, "어떤 계산도 지위도 무화"된 채 그들은 물기 어린 두 눈으로, 도망이 아닌 기도의 마음으로, 이제 서로를 번갈아 구하기 위한 선택을 계속해서 내리게 될 것이다.
어떤 소설의 여운은 그것을 읽기 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 뿐 아니라 나머지 삶을 다시 사는 기분을 들게 한다. 다른 강연에서 마음에 담았던 작가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이제는 '김애란의 소설을 읽는 일'도 곧 "삶의 방식"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게 된다. 서사의 가치와 어떤 진실을 한 가지 방식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 담고 있는 언어는 다른 이야기에서 같은 명도와 채도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연필가루 위에 연필가루를 얹"고 "선 위에 또 다른 선을 보태"듯이 다음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이제 읽어야겠다. 그리고 나서 한 번 더 그 감상을 글로 기록해야겠다. (2024.08.22.)
https://youtu.be/kjjwa6n-tZE?si=9ao69bJ-mtZokJCP
(소설가 김애란&문학평론가 신형철 북토크에 다녀와서)
김애란 소설을 읽으면서 감탄과 여운을 경험하는 건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문장력'이 아니라 '표현력'에서 비롯한다. 예를 들어 이런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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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그저 그 자리에 자신이 채권자로 앉아 있지 않기를 바랐다. 지우 또한 채무자가 아닌 친구로 거기 있어줬으면 했다. 소리 생각에 그러려면 둘 사이에 어떤 형식 혹은 교환이 필요할 것 같았다. 사람 사이의 어떤 계산 혹은 지위를 무화시키는."
"소리는 곧 채운과 만날 예정이었고, 그건 하나의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다는 뜻이었다."
-김애란, 『이중 하나는 거짓말』, 문학동네, 2024, 각각 131쪽, 135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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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야기들을 내내 집중하며 메모하고 기억한 하루. "작품이 점이라면 선을 잇는 마음으로 쓴다"라든가, "(표지의) 뒷모습 속 친구들이 한동안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같은 이야기, 혹은 "진정한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게 아니라 복수의 의존처를 갖게 되는 것", 그리고 "딜레마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것들은 답을 알려주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참여시킨다." 같은 것들. 몇 년 전 강연에서 작가님이 해주셨던 말도 떠올렸다. "이야기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전달될 수 없는 형태의 진실이 있다." 한 번 읽고 나서 또다시 펼칠 때 비로소 『이중 하나는 거짓말』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이제 두 번 읽은 소설을 세 번째로 펼쳐야 할 시간인 것 같다. (202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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