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의 실수로 잘 나가는 기장에서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된 '정우'(조정석)는 업계 블랙리스트 취급을 받게 된 상황에서 여러 채용 전형에 탈락한 뒤 술에 취한 상태로 떨어진 항공사에 여동생 이름으로 지원해 서류 전형에 합격해 버린다. 그렇게 얼마간 '정미'로 살게 되면서 생겨나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영화 <파일럿>(2024)의 중심이다.
영화 ‘파일럿’ 스틸컷
시대적, 문화적 특수성의 영향을 받는 속성상 코미디는 다른 장르보다 더 만들기 어렵다. 이를테면 소재와 설정에 대해 일종의 합의가 필요하다. 정우가 뷰티 인플루언서인 동생의 도움을 받아 '여장'을 한 채로 대부분의 작중 인물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라든지 기타 웃음을 유발하는 특정 상황들에 대한 공감대 형성의 정도가 그런 것들이다. 연출과 각본 자체보다 배우의 캐릭터 소화에 조금 더 공이 있다 할지라도 <파일럿>은 그럭저럭 호의적인 반응을 끌어낼 만한, 다시 말해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나설 만한 여름 엔터테인먼트의 기능을 한다.
어쩌면 그게 '한순간의 실수'가 아니었을 것이다. 평소에 뿌리내리고 있던 생각과 가치관 등의 총체가 그 순간의 언행으로 발화되기도 하니까.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정우가 완전한 이해와 공감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 조금 다른 생각을 할 기회를 겪게 되는 과정이 의미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앞선 회식 자리에서 상무의 진상 난동을 수습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발언을 했던 '정우'는 ('정미'인 채로 참석한) 또 다른 회식에서 여성 동료의 소신 발언에 얼어붙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비슷한 방식으로 되풀이한다. 후자의 회식은 여장 초기의 일이지만 외형적으로나마 남성의 시선을 받는 입장이 되어 그것을 의식하기 시작한 정우/정미의 행동과 반응은 매 장면 조금 더 유심히 보게 된다.
영화 ‘파일럿’ 스틸컷
그 배경에는 항공기 모형보다 발레옷 인형을 좋아하는 아들 '시후'(박다온)의 이야기나 비슷한 시기에 한에어에 입사한 또래 여성 '슬기'(이주명)의 이야기 등이 개입된다. 해묵은 '여장 남자' 이야기가 희화화를 위한 소재에 그치지 않고 직장에서 가정에서 고착화된 성 역할을 고민하는 화두를 열어준다는 점, 트로트 가수 팬덤과 같은 동시대 키워드에도 민첩하게 반응한 이야기라는 점이 <파일럿>을 볼 만한 가치 있는 영화로 만든다. (2024.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