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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30. 2024

아들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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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대해 형성되어 있는 첫 번째 기억 혹은 형상은 고모다. 서울 고모. 사실 서울이 아닌 의정부에 사셨던 고모를 나와 또래 사촌 형제들은 그렇게 불렀다. 경북 북부 작은 도시의 시야로는 서울이나 의정부나 모두 수도권이었고 엄마 아빠도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고모를 "서울 형님", "서울 누나"로 지칭했기 때문이다. 아빠가 3남 4녀 중 여섯째였고 서울 고모는 첫째여서 두 분의 나이 차이도 제법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서울 고모가 차지하는 존재감은 마치 '귀한 손님' 같았다. 명절 때마다 용돈을 많이 주셨던 서울 고모는 평소 자주 접하던 천원권이나 오천원권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그려진 만원권의 존재를 일깨워주신 분이기도 했다. 지금도 대부분의 친척 어른들은 영주에 계시는데, 그때는 명절이면 서울에서 오신 어른은 저렇게 초록색 지폐를 턱 내어주시는구나, 같은 지극히 어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가본 적 없던 서울은 내게 마치 어른의 장소, 서울 고모 정도는 되어야 사는 곳인 것처럼 여겨졌다.


수능시험을 본 뒤 정시 모집에서 추가 합격을 거쳐 정말로 서울에 소재한 대학으로 오게 됐다. 가군 대학 논술 전형에 응시하러 서울로 향할 때 엄마가 동행했다. 소풍이나 체험학습으로 잠실 롯데월드를 두어 번 방문해 본 것을 제외하면 서울 경험이 없었고 이제 막 운전면허를 딴 나와 달리 엄마는 어른이었으므로, 초행에는 엄마를 따라다녔다. KCM의 '안녕' 같은 노래들이 거리에 흘러나오던 겨울이었다. 정경대학 건물에서 논술 시험을 치르는 두 시간 동안 엄마는 1층 로비에 앉아 계셨다. 그 뒤 조금 더 가고 싶었고 조금(사실은 많이) 등록금 액수가 낮았던 나군 대학 경영학부에 합격했고, 만약을 위해 등록해 두었던 가군 대학에 등록 취소를 하러 다시 서울로 향하면서 내 서울살이는 정말로 시작됐다. 그때 엄마는 나 혼자 서울에 다녀오는 게 안심되지 않았는지 의정부의 서울 고모 댁에서 하루를 머무르게 했다. 대학교가 청량리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음에도, 대입 관련한 서류 접수 일로 서울로 왔다가 의정부에 있는 고모 댁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청량리역에 와 영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는 동선이 지금 생각하면 제법 비효율적이지만 당시에는 영주역에서 청량리역까지 무궁화호 열차로 세 시간 반이 넘게 걸렸음을 고려하면 한편으로 그 하룻밤은 부모와 떨어져 서울에서 지내는 경험을 미리 연습시키기 위한 엄마의 염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 낯선 곳에서 잠을 자야 하고 그것이 일상이 될 거라는 무언의 암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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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대해 말할 때 두 번째로 꺼내야 할 단어는 영화다. 서울로 오기 전까지 영주에서는 극장이라는 곳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렷하게 기억하는 최초의 극장 영화 관람은 대학교 2학년이 된 봄 잠시 좋아하던 후배와 지금은 메가박스가 된 CGV 상암에서 함께 본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때 어두운 상영관 안에서 알거나 낯선 사람들과 함께 보는 영화가 집에 누워서 TV로 보는 것과는 다른 경험이 된다는 걸 넌지시 배웠다.


시간이 흘러 영화 매체 객원 에디터를 거쳐 졸업 후 개봉영화의 PR과 마케팅에 종사하게 되면서 명절이 되면 "요즘에 영화 뭐 있노"로 시작하는 엄마 아빠와의 대화가 늘었다. 가끔 집 똑바로 치워 놓고 사람 구실 하며 사는가 보자 라며 내 서울 자취방에 (주로 엄마만) 하루이틀씩 왔다 가실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신도림 테크노마트나 디큐브백화점(현 현대백화점 디큐브시티) 구경 후 극장에서 함께 개봉작 한 편을 관람하는 것도 일과가 되었다. 엄마는 주로 드라마 장르의 한국영화를, 아빠는 주로 액션 장르의 미국영화를 좋아하시는데 엄마는 허허 웃으며 촌철살인의 20자 평을 하고 아빠는 "한국영화는 어설퍼" 하면서 TV에서 자주 보시던 이를테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나 <테이큰> 시리즈 같은 영화가 제 취향임을 내비친다. 평소 쓰거나 말하는 투와는 달리 청자의 눈높이를 조금 더 고려해야 하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볼 영화를 고르고 극장에 가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 신이 나 이런저런 '업계인'스러운 이야기를 늘어놓게 되고 그때만큼은 서울에서 영화를 볼 때 민감하게 중요시하는 휴대전화 사용이나 옆사람과의 대화 등의 '관크' 같은 것에 더 너그러워지게 된다.


영주에 지역 단관 극장은 있었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영화관(멀티플렉스)은 2018년 초 '롯데시네마 영주관'이 개관하면서 생겼다. 그 이전까지 영주 사람들은 '요즘 영화 <000> 재밌대' 같은 소문이 들리면 그걸 보러 옆 행정구역인, 메가박스와 CGV가 있는 안동으로 다녀오고는 했다. 극장 앱에서 보고 싶은 상영작을 골라 일시 장소 좌석까지 1-2분 안에 예매를 마치는 게 엄마 아빠에게는 말처럼 간단하지 않고 최신 영화 정보 등을 접하는 빈도나 경로의 차이도 있다 보니 영화에 대해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서울과 영주의 문화생활 인프라의 격차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TV의 지상파 명절 특선이나 케이블 채널 방영으로도 영화를 볼 수 있겠지만, 엄마 아빠에게 극장은 명절에 내가 영주에 가야 함께 가볼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스마트폰을 갤럭시 S3로 바꿀 무렵 대뜸 대리점에 가 "여기서 최고 좋고 비싼 폰으로 주세요" 하셨다는 (형으로부터 들은) 아빠의 일화를 떠올리면 "요새 제일 재밌는 영화 두 자리 주세요" 할 법한 아빠(와 엄마)의 대화도 상상이 되지만 기차 시간도 영주역에 직접 가서 보셔야 하는 아빠를 떠올리면 극장에 나 없이 가서 최신 개봉작을 관람하실 풍경이 썩 그려지지는 않는다.


영주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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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시간 아까워. 죽는 연습 하는 것 같아."


서울 고모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몇 번 있다. 대입을 앞두고 의정부 서울 고모 댁에서 하루 머물던 그날도 단지 TV를 보거나 과일을 깎아 먹거나 하는 일상적인 시간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날을 포함 지금까지 살면서 서너 번 들었을까 싶은 그 이야기가 제대로 형언할 수는 없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렇게 각별하다고 하기도 어려웠는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각각 돌아가셨을 때 제법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죽는 연습이 아니라 정말로 죽게 되신 어른들이 부재한다는 게 받아들이기 그리 쉽지 않은 경험으로 다가왔기 때문이겠지.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면서 나만 자라는 게 아니라 어른들도 늙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기 마련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할머니댁에서의 북적이던 명절 풍경도 점차 저마다의 가정에서 보내는 조용한 휴일들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명절이나 기일, 경조사 등이 아니면 친척들의 얼굴을 보는 일도 뜸해졌다. 그건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영화 리뷰를 쓰거나 하면서 서울에서 혼자 사는 삶에 젖어 있다 보면 자주 '가족'의 존재를 잊는다.


자는 시간이 아깝다던 서울 고모는 코로나19가 창궐했던 해 초여름 사우나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아빠가 소리를 내며 우는 모습을 그때 의정부백병원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봤다. 눈을 감고 몇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 정말 죽는 연습이라면, 그건 많이 하는 게 좋을까 적게 하는 게 좋을까. 세상 많은 일들이 단지 연습한다고 잘 되는 것도 연습 안 한다고 못 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서울 고모의 그 말씀은 언제든 불현듯 떠오를 것 같다. 죽음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벌써부터 주의 깊게 생각할 시기는 아닐지 모르지만 삶에는 연습이나 시뮬레이션이 허락되지 않으니 다만 그 모든 걸 어찌할 수는 없으리라는 일말의 체념적인 태도를 가지고 또 하루를 맞이한다. 그건 십수 년을 산 서울을 집으로 인식하게 된, 여전히 좋은 아들 되기 연습을 거듭하고 있는 지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게 삶이로구나.”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마음산책, 2004,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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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를 명절마다 떠올리고 늦여름마다 떠올리는데 이번 추석은 늦여름처럼 더운 명절이었다. 주인공 '료타'(아베 히로시)의 형의 기일을 맞아 본가에서 삼 대 가족이 모여 함께 하루를 보낸다. 재혼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미처 말 못 할 사정들로 가시방석 같은 낮과 저녁과 밤을 보낸 다음날 료타는 버스에 올라 뒷좌석에 앉으며 마침내 큰 과제를 끝마친 사람처럼 후련한 듯 뒤를 돌아본다. 멀어져 가는 그 버스를 보며 료타의 아버지는 "다음엔 설에 보겠군" 하고 중얼거린다. 마치 이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바로 다음 장면에서 료타는 "이제 설에는 안 가도 되겠어"라 말하고, 아내도 거기 장단 맞추듯 "부담스러우실 테니 다음에는 자지 말고 저녁에 와요"라고 호응한다. 이렇게 사소한 어긋남 같은 것이 <걸어도 걸어도>의 핵심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오랜만에 찾아 이전과 많이 달라진 동네를 헤매느라 땀 투성이가 되는 광경이나 마음 속내를 있는 대로 내보이지 못하고 투박한 몇 마디 내뱉고 돌아서 이마를 짚는 풍경, 생물이 생동하는 계절과 태산 같던 부모의 무기력하고 나약해진 뒷모습의 교차가 <걸어도 걸어도>의 상영시간을 내내 채운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빼놓을 수 없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몇 걸음 차이를 두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두 사람의 모습. 그건 가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채워질 수만은 없는 어떤 거리감, 더불어 세월을 보낸 중년 혹은 노년의 뒷모습 같은 것이다. 그 이미지는 내게 추석날 오후 롯데시네마 영주에서 <베테랑 2>를 보고 나와 덥다며 택시를 타러 가는 엄마와 아빠의 뒷모습 같기도 하다. 한 손에 담배를 물고 콜택시 차량번호 네 자리를 중얼거리는 아빠와 몇 걸음 뒤에 떨어져 따라 걷는 엄마.


롯데시네마 영주 앞 거리에서


서울 고모가 돌아가신 후 4년 동안만큼이나 엄마 아빠가 나이 드셨다는 걸 체감한 시기도 없을 것이다. 엄마는 오래전부터 그래왔지만 부쩍 허리가 좋지 않아 수도권에 있는 몇 군데 병원에 (대체로 나와 함께) 다니셨고, 아빠는 정년퇴직 후 얼마 전에는 일시적으로 건강이 안 좋아지시기도 했다. 엄마는 아르바이트를 포함해 주로 청소나 조리와 관련된 이런저런 일들을 계속하셨지만 아빠는 계약직이지만 지금 하고 있는 시청의 불법주차나 노점상 단속 일을 하시게 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아빠는 술을 부쩍 줄여야 했고 엄마는 허리 대신 다른 문제로 원주에 있는 병원에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다. YTN에서 방영된 뉴스 속 어느 요양병원의 60대 노인이 실종됐다 10킬로미터 떨어진 터널에서 발견되었다는 아나운서의 언급을 들으며 "60대가 뭔 노인이라고" 하시던 아빠의 말이 서울로 돌아오는 KTX 열차에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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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엄마도 아빠도 부쩍 늙는 중이다. 아들들이 30대 중후반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늘 이렇다니까. 꼭 한 발씩 늦어."라던 영화 속 료타처럼 언제나 한발 늦게 그걸 상기한다. 요즘은 조금 의식적으로 며칠마다 엄마 혹은 아빠에게 주로 퇴근길에 안부 확인차 전화를 걸어본다. 엄마는 주로 내가 밥을 먹었는지 반찬은 뭘 먹었는지 확인하고 아빠는 주로 날씨 이야기를 하거나 내 출퇴근 이야기를 한다. 최근에는 듣고 싶다고 한 중고 LP 몇 개를 사드렸다. 엄마에게 전화를 하면 아빠 이야기가 나오고 아빠에게 전화를 하면 엄마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 아빠의 단골 마무리 멘트는 "(엄마한테) 전화 자주 하고"다. 이 말은 이제는 영화 밖에서도 고인이 된 <걸어도 걸어도> 속 료타의 아버지(하라다 요시오)가 "가끔은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목소리라도 들려드려라"라고 말하던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다. "전화 자주 하고" 또는 "전화 자주 하고..." 정도의 의미로 전하는 아빠의 말투라는 게 대체로 그렇다. "전화 자주 해."라고 하면 문장을 끝맺는 것 같으니까 괜히 말줄임을 하거나 접속어 내지 다음 말이 이어질 것 같은 투의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생활 잘하고. 밥 잘 챙겨 먹고. 연휴에도 가능한 서울에서 시간을 길게 보내고자 하는 나는 이번 추석에도 차례 전날 오후 5시가 넘어 영주역에 도착하도록 KTX를 예매했다. 아빠는 아쉬운 듯 다음 설에는 일찌거이 오는 걸로 차표 끊고, 하시고 나는 서버시간까지 검색해 가며 대기번호 1천 번 초반대로 여유 있게 예약에 성공했지만 '전 국민 수강신청'이라 불리는 코레일 명절 승차권 예매 경쟁을 핑계 삼는다.


서울 살이에 익숙해져 제 안위만을 돌보기 바쁜 둘째 아들은 무뚝뚝하게 '용건만 간단히' 통화한다. 대화는 몇 분을 넘기지 않는다. "별일 없으면 됐다"라는 엄마의 단골 대사도 등장한다. 혼자 사는 내가 가정을 꾸릴 무렵이 되면 그때는 조금 더 엄마 아빠에게 다감한 자식이 될 수 있을까. 그건 언제가 될 것이며 그때 엄마 아빠는 지금과 비슷한 정도의 건강한 모습으로 있으실는지.


사실 얼마 전부터 서울 한번 왔다 가겠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몇 달째 한 귀로 흘려듣는 중이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서울 내 자취방에 오면 언제나 청소를 하시는 엄마의 모습이 내게 편하지 않게 다가와서다. 그냥 가만히 먹고 놀고 쉬다 가셔도 좋을 텐데 내가 해 먹고사는 모습이 온전히 만족스럽지 않으실 테고 뭐라도 하고 싶으시겠지. 우스갯소리로 가족 몰래 어디 살림이라도 차린 거 아니냐고 하셨지만 나는 상술한 모습이 불편하다는 말을 선뜻 꺼내지 못해 알아서 잘하고 살고 있다고, 이런저런 모임이나 약속 핑계를 대며 "다음에"나 "나중에"를 입 밖으로 꺼내고는 한다.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엄마 말로는 당신을 내 자취방에 데려다 놓고 내 일정이 있으면 뭐든 알아서 보내라고 하지만, 엄마를 집에 혼자 두고 어딜 다녀오거나 하는 것 자체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 일이다. 집의 문단속과 같은 일에 대해서도, 그리고 내 나름대로 형성해 놓은 방 곳곳의 물건 배치와 같은 일종의 질서가 훼손될까 하는 걱정은 물론, 어쩌면 근원적으로 나는 몇 년을 홀로 살아온 삶의 공간에 가족일지라도 누군가를 무심히 들여놓을 준비가 아직 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있어서도. 아빠도 마찬가지지만 엄마도 제 혼자의 일상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과 달리 자식에게 거는 어떤 기대나 의존을 떨치지 못하는 그 마음도 전혀 헤아려지지 않는 것은 아님에도 내 공간의 벽을 선뜻 허물기란 어렵다. 다음주말은 안 돼요. 그날은 바빠요. 그래서 나는 자꾸만 다음을 더 다음으로 미루고야 만다.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박소란, 「다음에」, 『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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