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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Oct 16. 2016

21세기의 완연한 고전, 영화같은 순간들의 이야기

<라이프 오브 파이>(2012), 이안

<라이프 오브 파이>는 "배에서 호랑이랑 같이 지내는 영화" 정도로는 그 본질을 조금도 전할 수 없다. 난파한 배에서 몇 개월의 시간을 뚫고 살아 돌아온 에피소드 쯤은 새발의 피에 불과한 '파이'의 이야기는 자신의 탄생에서부터 그 모든 삶의 궤적들을 향하여 차근차근 상세히 그러나 중요한 것들로만 인도한다. 여기서 어린 시절의 '파이'가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가르침은 구명보트에서 겪는 경험의 큰 줄기를 관통한다. 작별인사를 하지도 못했던 여인에 대해서는 아쉬워 할 겨를도 없이 그 자체로 인연에 대한 깨달음을 찾아낸다. 숱한 비언어적 경험들은 그 순간을 지나고 나면 자신이 아니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의 아름다운 색깔들로 피어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파이'는 자신을 찾아온 작가에게 "신의 존재를 믿게 하는 이야기"라고 강조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가 '진짜'라고 애써 변호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나면 "어느 쪽이 더 맘에 드냐"며 넌지시 물을 뿐이다. 그래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우리가 언제든 들어온 이야기이며, 동시에 우리가 미처 듣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의 삶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겪게 될, 그 누구에게도 납득시키기 어려운 고유하고 찬란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을 지니는 것은, 내가 그 중심에 서게 될 것이라고는 감히 염두에 두지도 않았거나 못했던 생의 막대한 파도에 듣는 이를 잠시 그리고 영원히 올려놓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에서 이야기의 신은 당신이다. 그러나 당신의 우주에는 분명 당신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초자연의 순간들이 있다.



나도 모르는 내 속의 언어를 끄집어내기 위해, 그리고 내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정확히 같은 순간을 경험할 수는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타인에게 전해주고 싶어하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의 순간을 함께 하며, 마침내 이야기가 된다. 사냥꾼과 호랑이 중 누가 '리처드 파커'인지, '파이'가 정말로 호랑이를 길들였는지와 같은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그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는지 그것만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믿고,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며, 겪지 못한 것들에 눈물 흘린다. 거기에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마침내 언어를 초월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그런 이야기들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고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속절없는 희망의 낮과 절망의 밤들을 지나 다시 꿈에 잠겨든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꿈같은 체험을 스크린 바깥에서 황홀하리만치 가능하게 해준다. 영화의 역사를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한 편의 이야기가 전달하고 내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슬프면서 풍부하고 유려한 세계가 여기 깊게 자리하고 있다. 영화의 본질을 이야기라고 한다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21세기의 완연한 고전이다. 영화의 본질이 영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 10/10점.)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 이안

2013년 1월 1일 (국내) 개봉, 127분, 전체 관람가.


출연: 수라즈 샤르마, 이르판 칸, 라프 사팰, 타부, 아딜 후세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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