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기스 플랜'(2015)
개봉 당시에는 인지할 수 없었지만 <매기스 플랜>(2015)에는 내가 걸어본 장소가 나온다. 뉴욕 맨해튼의 이스트 14번가 인근에 자리한 유니언 스퀘어 파크. 주인공 ‘매기’(그레타 거윅)가 비즈니스 미팅을 앞두고 산책하는 곳이다. 대학교수인 ‘존’(에단 호크)과 소설 원고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의 국내 개봉 당시인 2017년 1월 말은 뉴욕 여행을 하기 약 두 달 전이었으므로 그땐 당연히 모르는 장소였지만, 영화를 다시 보면서 영화 초반의 몇 분을 차지하는 유니언 스퀘어가 새삼 친숙한 장소로 다가왔다. 단지 뉴욕의 일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 속 ‘매기’처럼 걸어보았기 때문이겠지.
마치 <프란시스 하>의 ‘프란시스’가 스스로 “안 생기는(Undatable)”이라고 표현하듯 <매기스 플랜>의 ‘매기’는 사랑에 있어서 타협한 인물이다. 흔한 에세이 제목처럼 말하자면 ‘결혼은 안 하고 싶지만 아이는 갖고 싶어’라고도 해볼까. 스스로 6개월 이상 남자를 진지하게 만나본 적도 없다며, 그렇지만 중년이 되어 마지막 선택지처럼 어쩔 수 없이 하는 건 싫고 지금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다며 정자은행을 이용할 ‘계획’을 세운다. 마침 전 남자친구 중 한 명인 ‘가이’(트래비스 험멜)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에게 정자를 제공받기로 한 것. 그런데 정자를 받고 나서 ‘계획’을 실행하려는 바로 그 순간… 앞서 언급한 대학교수 ‘존’과 우연히 사랑에 빠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겠다는 걸 납득할까.
<매기스 플랜>은 그저 또 한 편의 ‘뉴욕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삶을 살아갈 태도와 가치관에 대한 주인공의 성장담에 가깝다. 당겨 말하면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라는 걸 뒤늦게 깨달아가는 이야기라고 해볼 수 있겠다. 당장 영화 제목부터 ‘매기의 계획’인데, 영화에는 ‘아이를 갖는 계획’을 포함해 ‘매기’가 세우거나 생각하는 몇 가지 계획들이 나오지만 전부 그대로 되지 않는다. 애초 정자를 받아 결혼 없이 아이를 낳으려던 것부터가 ‘존’의 등장으로 인해 ‘결혼 있는 출산’으로 뒤바뀌기 때문이다.
‘매기’는 편부모와 살면서 열두 살 때부터 각종 가사 일을 도맡으며 자랐다. 독립적으로 무언가를 정하고 계획적으로 행하는 삶을 일찍이 터득한 인물이니 육아와 결혼에 대한 관념도 서른 무렵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확립하고 실행에 옮기려 했던 것일 듯하다. 이는 결혼이나 이성애가 삶과 서사의 필수 요건이 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몇 년 전부터의 여성 서사 경향을 바람직하게 반영하는 면도 있다. 그보다 <매기스 플랜>에서 ‘매기’의 이런 생각은, ‘매기’가 마치 스스로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의 그것에 있어서도 소위 ‘오지라퍼’로 불릴 수 있을 만큼 개입하려 한다는 점에서 캐릭터를 잘 구축한 사례다. 이건 미래를 완벽하게 설계하고 싶었던 인물이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후 “다신 누군가의 운명에 끼어들지 않을 거예요. 내 운명에도.”라고 말하게 된다.
‘매기’와 ‘존’은 물론 ‘존’의 (첫 번째) 아내인 ‘조젯’(줄리안 무어), ‘매기’의 친구인 변호사 ‘토니’(빌 헤이더) 등 상영시간이 98분에 불과한 이 영화의 이야기를 꽉 채우는 얼굴들이 쉴 틈 없이 빠른 편집과 전개 속에서 비중에 상관없이 매력적인 캐릭터와 인물 관계를 형성한다. 흔한 사랑 영화가 아니라고 했지만 사랑에 관해서도 생각할 여지는 있다. 바로 처음 ‘매기’에게 정자를 제공해 주었던 ‘가이’라는 인물이 하는 말 때문인데, 정자를 얻기 전 ‘매기’가 대뜸 묻는다. “왜 수학자가 되지 않았어?” 그는 지금 수제 피클 만드는 사업을 하고 있다. 그런 ‘가이’가 이렇게 대답한다. “수학자가 되고 싶다 생각하지는 않았어. 단지 수학이 아름다워서 좋아한 것뿐이야.”
그가 수학자가 되지 않은 건, 결국 인간의 한계 때문에 전체를 다 꿰뚫을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한 데도 수학이라는 학문을 좇으며 모든 조각을 정확히 맞추려 애쓰느라 평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도 삶도 불완전함을 끌어안으며 사는 것이기에 이 말에 끄덕이게 되는 것도 있지만 작중 ‘조젯’이 일련의 계획들에 실패한 ‘매기’에게 “아예 생각 면허증을 취소해 버려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 또 하나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니 우리, 너무 모든 것을 ‘생각대로’의 범주에 넣기 위해 애쓰지 말자고. 불완전함은 물론 불확실성에 대해서도 순응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생각 면허증 대신,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일의 면허증을 갖고 싶다는 궁리를 하게 되는 영화다. (20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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