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Nov 22. 2016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 그쯤 어딘가에 살고 싶다

<가려진 시간>(2016), 엄태화

엄태화 감독의 <잉투기>(2013) 이후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 이 정도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놀랍다. <늑대소년>(2012) 같은 쉽게 떠올릴 법한 고만고만한 작품(<늑대소년>도 결코 '못 만든' 작품에 들어간다 생각지는 않는다. 상대적 지표일 뿐이다.)을 떠올리며, '강동원 혼자 '하드 캐리' 하겠지' 식의 막연한 감상으로 극장에 갔을 나 같은 관객이라면 <늑대소년>을 떠올릴 겨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아니, 송중기가 주연한 그 영화는 몇 가지 외면적인 설정만 떠올리게 할 뿐, <가려진 시간>의 전체의 얼개는 다른 곳에 있다.


말하자면, 이야기(A, 소설가) 속에 이야기(B, 화자 1 혹은 주인공 1)가 있고 그 이야기(B)는 또 다른 이야기(C, 주인공 2 혹은 화자 2)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영화 밖 현실에서 우리는 그 이야기(A*B*C)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못하고 또 다른 방식의 이야기(D, 현실)로 재가공해버리곤 하는 것이다. 믿음과 사랑의 순수함을 믿는 소녀와, 그 소녀를 위해 한없이 생을 건 소년.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포용하고 경청한 화자와, 그 어떤 방식의 스토리텔링으로도 그것을 결코 수용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 종합해보면 <가려진 시간>은 그런 이상과 현실 사이의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넓고 깊은 간극을 슬프고 아름답게, 아름답고 슬프게, 상업영화라는 범주 안에서 새롭지만 뛰어나게 조율해낸 작품인 것이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는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2014, 마음산책, 65쪽.)



세상 안팎 많은 이야기 중 '나'의 이야기는 내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결코 완전하게 겪어낼 수 없다. '나'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그 감정이고, 그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은 고유한 나를 구성하는, 나의 이야기가 겪어온 궤적에 있다. 이 영화는 탁월한 시각적 성취와 함께 그 이야기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가려진 시간>이 관객의 동심의 순수함과 밀도 따위를 측정하는, 그런 의도를 지닌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경찰은 대체로 직업적 관성에 젖어 있으며, 극 중 그들이 재등장하고 활동하는 방식 역시 '영화의 관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그 점이 그 이야기와 이 세상의 경계를 만들어낸다. '백기'(권해효)가 '수린'(신은수)에게 조용히 전하는 이야기는 'A*B*C'의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D'로 만들어야만 '편히' 지낼 수 있는 퍽퍽한 현실을 재확인하고 수용하는 과정인 것이다. <가려진 시간>을 보며 수십만 인파가 매 주말마다 광장에 모이는 오늘 여기의 현실과 그 현실이 만들어낸 참혹한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리든, 혹은 어릴 적 한 번쯤 상상했을 낭만적 판타지를 떠올리든 그것은 전적으로 관객 몫이다.



그러니까, SF와 판타지의 불모지인 한국 영화 시장에서 시대를 앞서간 한 영화가 있다. 그저 시각 화술로만 승부하지도, 배우에게 모든 것을 기대지도 않는다. 이상과 현실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대한, 풍부하고 탄탄한 착상과 구현이 있다. 이 우주에 하나쯤 있을, 나 하나만 알고 믿고 겪어도 좋을 이야기. <가려진 시간>은 <라이프 오브 파이>(2012)의 큰 줄기 하나를 놀랍도록 뛰어나게 닮아 있었다. 감독이 택한 결말과, 이 결말이 낳을 또 다른 이야기의 모든 시작을 응원한다. 조금 건너뛰면 상반기 한국 영화에 나홍진의 <곡성>이 있었다면, 하반기에는 <가려진 시간>이 있다. (★ 9/10점.)


<가려진 시간>(2016), 엄태화

2016년 11월 16일 개봉, 129분, 12세 관람가.


출연: 강동원, 신은수, 이효제, 김희원, 김단율, 권해효, 정우진, 엄태구, 문소리 등.


제작: (주)바른손이앤에이

배급: (주)쇼박스




*좋아요와 덧글, 공유는 글쓴이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