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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후의 안부

by 김동진

[Web발신]

김동진님의 정기검진 시기가 됐습니다. 연락주세요. 자연치아살리기 연세봄치과의원


내 입 안 곳곳을 한동안 들여다본 원장님은 금세 싹 파악한 듯 치경에 가까이 집중해 있던 고개를 잠시 뒤로 물리며 두 눈을 한 번 깜빡인다. 임플란트 자리가 아니라 치아 전체를 조망하는 그의 눈빛이 내 입을 벌린 동안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그동안 불편한 건 없었냐는 물음은 마스크를 통과해 또렷이 들린다.


관리 잘하셨네. (엑스레이) 사진을 찍는 이유는 잇몸 뼈가 임플란트랑 서로 잘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기 위한 건데 보니까 다행히 예후가 굉장히 좋아요. 덧니가 있어서 주로 상하악에 치석이 좀 생기시는 편이니 오늘 상하악 스케일링 한 번 하시고, 다음번 검진 때 전체를 싹 하도록 합시다. 이 선생, 김동진 환자 상하악 주변만 스케일링해주시되 12번 측절치*는 레진으로 때운 거니까 가급적이면 직접 안 건드리는 게 좋을 거야.


어금니 임플란트 수술을 모두 마무리 한 뒤 6개월 만이었다. 안내받은 대로 임플란트 주위에 어금니 칫솔과 치간 칫솔을 매 양치 때마다 열심히 사용했다. 말 잘 듣는 학생이 된 듯 매일 쓰기는 했지만 정말 잘 관리한 게 맞는지 불안함 반, 숙제 잘했다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 반으로 찾은 저녁의 치과. 내가 거울 따위로는 아무리 눈알을 굴려도 볼 수 없는 구석구석을 잠깐만 봐도 똑바로 능숙하게 헤아리는 원장님의 짧은 검진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6개월 뒤를 기약하며 치과를 나선다. 내년에 뵙겠습니다.


작년 하반기, 치과에 십 수 차례 다니면서 이곳저곳을 때우고 긁어내고 씌우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 언제나 문자를 받았다. 주로 이런 내용.


[Web발신]

자연치살리기최선하는연세봄치과의원입니다.김동진님의예약은10월16일 7시입니다


단문의 제한된 글자 수 안에 눌러 담은 저 예약 시간 안내에는 어쩐지 "잘 지내셨나요?" 같은 물음이 생략돼 있는 것만 같았다. 당신 잘 지내고 있는 동안 혹시 잊었을 수도 있는데 내일 치과 와야 하는 날이니 잊지 말고 시간 맞춰 방문해주시라는. 예정을 일깨워 주면서도 어쩐지 안부를 묻는 듯한. 그건 단지 노쇼를 방지하고 치과 영업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한 리마인더 정도이지만 치과가 품은 금속 수술도구의 질감과 소독약, 알지네이트* 냄새 따위의 너머에도 사람의 수고가 있다. 나도 잊을 수 있는 걸 누군가 잊지 않아 주는 일. 한 치과에 수개월 동안 다니다 보면 거기 근무하는 모든 사람의 얼굴을 알게 되고 나 말고도 수 십 수 백 명의 내원객이 있겠지만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오셨어요?" 같은 식으로 이따금 인사가 바뀐다. 잘 모르는 사무적인 관계에서 주기적으로 오가는 이런 인사를 몇 달 만에 찾은 치과에서 생각하다 보니 불현듯 몇 해 전 받았던 이메일 하나가 떠올랐다. 클릭할 수밖에 없는 제목의 이메일이었고 그 한 통에 몇 년의 시간이 밀려들어왔다. 어쩐지 내 입 안을 나보다 더 잘 들여다봐주는 사람(들과 기계)들이 묻는 계산된 안부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진심을 담아 보내왔던 순수한 안부를 동일선상에 놓고 싶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제목: [동진, 00예요.]


코로나19가 처음 세계적으로 창궐해 국내에서도 어디서 몇 번째 확진자가 나왔고 그 사람의 동선은 어떠했다는 등의 뉴스가 연일 속보처럼 나오던 그 해 3월. 그로부터 2년 전 헤어졌던 L에게서 온 이메일이었다. 주소는 바뀌어 있었다. 메일은 "못 받더라도 보내봐야지. 봄은 다시 오네요. 잘 지내고 있지?"로 시작했다. 뜬금없는 연락이지만 순수하게 인사하고 싶었다며, 불편하게 전달되진 않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라는 L의 문장은 다분히 대면을 조심하며 마스크를 써야만 했던 일상 속에서 누군가를 가만히 떠올리는 마음일 수 있다고 생각돼 불편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시절 인연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 물어본 적이 나는 있었던가.


한 번도 없었다. 대체로 지나간 관계에 대해서 안녕을 묻는 일을 '굳이' 하는 생각으로 넘어가거나 혹은 묻는 일 자체가 껄끄럽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주로 고마운 마음을 느끼며 나 역시 당신의 평화와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다고 답장했었다. 당신이 내게 주었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일상 속에서 깨닫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L의 말을 나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돌려주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불행을 바라게 되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지나고 보면 악담과 저주를 퍼부을 사람은 고맙게도 내겐 없었다. 그건 오직 스스로를 책망하는 쪽으로 향했을 뿐이다. 그 시절들 각각의 시점에서 당신들의 마음을 조금 더 잘 헤아리지 못했던, 조금 더 말을 고르고 다듬어 발화하지 못했던, 쉽게 판단하고 어떤 사람의 마음에 대해 안다고 해석이나 숙고 없이 착각해 버렸던 날들. 무엇보다 삐걱거리는 문제가 생겨도 돌보려 하지 않았던 날들. 충치가 보이거나 해도 괜찮겠지 하며 균열을 유보한 나날은 생채기 정도를 넘어 뿌리를 뽑는 아픔을 불렀다.


우리는 이미 한 번 헤어졌었고 다시 만난 뒤에도 결국은 동일한 이유로 완전히 작별했으므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든지 L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내가 당신의 서른을 함께해 준 덕에 당신의 30대가 단단한 토양에서 자라날 수 있었고 내가 아니었다면 스스로 너무나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라며 그건 행운이었다고 담담히 써 내려간 말들은 분명 며칠간 맴돌았다. 나도 L과 함께인 동안 서른을 맞이했고 30대를 시작하는 동안 그를 떠나보내야 했으니까. 대답할 수 없어도 어떻게든 답을 같이 찾아보려 한 시절이 있었다. 더 적극적이고 치열하지 못했을 뿐이다. 돌아보면 충분히 아프게 직면하려 하지 않았다.


사랑했던 사람을 잊는 일은 내 몸과 마음의 일부를 도려내는 일이다. 어떤 연유로든,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했든 간에. 몸을 떼어내도 남는 것이 있다. 아직도 광화문의 어느 스타벅스에서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의 일부는 스토리보드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고 특히 내 미숙한 치기와 부족한 이해로 말미암은 말과 행동은 갈수록 옅어져만 간다. 비가 제법 내렸던 오후, 이미 진작 다 마신 아이스 음료의 얼음 사이를 빨대로 휘젓는 나와 티백 끝에 달린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그. 한동안 말이 이어지지 않고 가만히 촉촉해지던 두 사람의 눈. 지금은 그런 일이 있어도 밥이 넘어가고 잘 살아지기도 한다는 걸 알 만한 나이가 됐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써 담담히 안아주고 손을 흔들고 나서는 며칠을 내내 앓기만 했다. 편지함 속에 담긴 사진과 엽서들을 만지며 훌쩍였고 카톡 대화를 끝없이 올려다보며 또 울었고 메모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진들을 차마 지울 수 없어 몇 날 며칠을 멍하니 죽은 듯 보냈었다. 정작 이별을 고한 건 나였는데도 누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 쓰는 근육을 칼날로 절개한 듯한 기분이었다.


함께 연결된 사람이 없고 서로 연락처도 바뀌어 L이 그 이후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에게 문득 이메일이나 그 비슷한 걸 보내는 날이 있을까. 꼭 세계적인 전염병이 계기나 핑계가 되지 않더라도, 답장을 기대하지 않아야 할 법한 안부를 묻게 될 날이 내게도 없으리라고는 확언할 수 없겠다. 우리들 대부분은 두 번째 이후의 사랑을 하고 있거나 떠나보냈고 그건 감기에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것처럼 또다시 제 몸과 치아가 도려내어지고 깊이 파헤쳐지는 순간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기워내고 덧붙이며 끝없이 수선해 나가면서도 거기 또 구멍이 날지 모른다는 걸, 그러면 또 수술 도구를 꺼내야 한다는 걸 이제는 모르지 않을 만큼은 살아보았으니까. 아는 만큼 또 아프고야 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말하고 묻고 있는 것들은 과거의 나에게는 없었던 언어들 같다. 몸이 기억하는 감각과 언어가 쌓여간다는 건 이전의 나라면 하지 않거나 못했을 성찰이나 판단도 조금씩은, 혹은 가까스로 해내게 되는 일이 아닐까. 내 것이 아니었던 걸 타인에 의해 내 것처럼 소화하고 삼키는 일. 보철을 씌운 치아들에게도 내 것이 아닌 금속이 몸의 일부처럼 달라붙어 있고 임플란트를 식립한 자리는 아예 뿌리까지도 내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아닌 것들을 끊임없이 이어 붙이고 핏물을 삼켜 가면서 겨우 잇몸을 회복한다. 임플란트는 자연 치아가 씹는 힘의 100퍼센트를 내지 못하는 건 물론 치아 신경과 치주인대가 없다. 그래서 통증과 같은 감각으로 치주질환의 전조증상을 예견할 수가 없다. 보철물의 형태와 재질의 특성상 플라그가 더 끼기 쉽고 일반 칫솔만으로는 제대로 닦기 어려워 치간 칫솔이나 어금니 칫솔로도 관리해줘야 한다. 아프지 않다고 느껴도 방치하면 안 되고 먼저 닦고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돌봄은 혼자서 제대로 다 해내기는 무리인 종류의 일 같다. 자족의 세계에서 타인이나 연인의 인정과 위로 자체가 필수적이지는 않다고 해도, 겨우 칫솔질만 해서는 닦아낼 수 없는 치석이 있고 나보다 나의 세부를 더 잘 간파해 주는 손길과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 요즘은 그런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니까 혼자서는 사각지대가 생기지 않도록 막아낼 수 없으니 타자를 내 거울로 여겨야 한다는 것. 그건 돌봄과 안부가 곧 성실한 마음의 반복에서 비롯한다는 걸 일깨워주는 면도 있다. 치위생사가 스케일링을 해주는 동안 제 눈에도 보이지 않는 걸 누군가 대신 살펴주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치과 의자에서 내려온 뒤 입 안을 헹구며 떠올리는 건 어떤 지난 마음의 습관이다. 아플 때 바로 달려가기는커녕 통증도 방치했던 나날이나 불편해도 당장 치과에 가려 하지 않았던 순간을 치과 예약 확인 문자는 늘 상기시킨다. 지금 내가 무얼 씹을 수 있는 건 내 치아가 잘 나서가 아니라 실은 정말 못났고 그걸 못났다고 하지 않고 수고스럽게 돌봐준 곳이 있어서 라는 것을. Web발신 문자와 이메일이 같은 선에 있을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걸 돌보는 안부의 궤도에서는 어느 정도 공명하는 면이 그래서 있는 것만 같다.


임플란트 식립 뒤 관리를 잘한 것은 물론 임플란트가 내 잇몸에 제 것처럼 잘 자리 잡았다는 원장님의 말에 안심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보지 못한 상흔과 마음의 그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이따금 스친다. 침을 삼키고 물을 들이켜도 다 넘어가지 않는 게 있다. 어떤 일이든 그로부터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고 내가 겨우 할 수 있는 일은 꾸준히 나와 타인을 돌보려는 마음을 잃지 않고 지금의 소중한 것들의 안녕을 궁금해하는 일뿐이다. 혼자서 다 돌볼 수 없으니 거울처럼 누군가를 생각하고 챙기면서 그로인해 나 자신을 살피기도 하는 일이겠지. 다음 치과 검진 무렵,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개월 뒤의 나는 어떤 봄날을 맞이하고 있을까.


이 글을 맺고 나면 L의 이메일을 더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만은 열렬한 진심이었겠지만 지나온 시절은 오히려 모나고 서툴렀기 때문에 나를 자라게 했겠다. 지금의 내가 가진 어떤 불완전함과 미숙함도 훗날의 나를 그렇게 만들어주겠지. 이제는 내일의 나와 가족과 소중한 친구를 생각해야겠다. 언젠가 다시 마음을 누군가에게 온전히 쏟게 될 나날이 올 것이다. 언젠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의 무게를 마주하고 또 다시 울게 될 날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손등을 가만히 쓸어내리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이제는 다음을 살아야 한다. 넘어질 자리에 젖은 흙을 덮는 마음으로. 이전에는 더 아픈 일을 겪고 싶지 않아 작은 통증을 체화하며 유보했다면 이제는 사랑에 함께 따르는 어떤 고통까지도 기꺼이 외면하지 않고 싶다. 돌볼 수 있는 마음과 살아 있는 몸이 있는 한, 그리고 그렇게 고통까지 함께이고 싶다 여기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가까스로. 너무 힘들고 아프지 않은 지 물어가면서 주먹을 꽉 쥐고. 그런 궁리 또는 작정을 하며 오래된 메일함을 뒤져 아직 지우지 않았던 그 이메일을 삭제한다. 휴지통을 비우시겠습니까? 네. 메일함을 닫고 머금고 있던 커피 한 모금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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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

-박소란, 「푸른 밤」, 『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2015)


*12번 측절치: 상악 우측의, 가운데 앞니 옆에 있는 작은 앞니를 말함.

*알지네이트(Alginate): 해조류 추출 천연 소재로 치과에서 주로 치아(크라운, 임플란트)의 본을 뜨는 용도로 사용함.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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