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지 않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로 맞는 새해

by 김동진

회사에서 장기 근속 휴가를 받아 일본 도쿄로 떠나는 길, 출국 심사를 마친 뒤 라운지에서 키보드를 꺼낸다. 7박 8일의 일정이다. 이 정도의 여정은 정말 오랜만이다. 떠나기 전, 주인공이 직감적인 결심으로 어디론가 떠나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작품이 바로 지금 소개할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이다.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감독, 각본가인 벤 스틸러가 영화의 연출과 주연을 맡았다.


영화의 주인공 '월터 미티'는 회사의 주인이 바뀌고 종이 잡지의 폐간을 앞둔 '라이프'지에서 16년째 필름 사진 인화를 담당하고 있다. 이미 12년 전에 나온 이 영화에서도 종이 잡지와 필름 사진은 시대의 뒤안길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영화 속 새 경영진은 '라이프'의 지면을 폐간하고 온라인에 주력할 것을 선언하고 대규모의 인력 구조조정을 한다. 그런 와중에 월터는 지면 마지막 호의 표지 사진을 사진 작가 '숀 오코넬'(숀 펜)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런데 숀이 인편으로 보내온 필름 사진들 중에는 바로 숀이 직접 표지로 써 달라고 한 '25번 사진'이 없다. 회사에서 잘릴 위기에 처한 월터는 무작정 숀이 보내온 사진 속 단서를 수소문해 어딘가에 있을 숀을 찾아 떠난다.


월터가 일하는 잡지사 '라이프'의 모토는 영화에서 제법 중요하게 인용, 언급된다. '세상을 보고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영화의 영어 제목('The Secret Lite of Walter Mitty')이 암시하듯 월터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 하나 있는데 바로 공상에 빠지는 것. 자기만의 상상 속에서 재난 블록버스터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수퍼히어로가 되기도 하며 호감이 생긴 회사 내 다른 직원과의 관계 진전을 상상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옆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을 만큼 거기 빠진다는 것.


하지만 월터는 성실한 인물이다. 가계 지출 내역을 수기로 정성스럽게 기록하고 어머니와 여동생을 살뜰히 챙기는 건 물론이고 회사에서도 사진 작가 숀이 월터에게만 연락을 취할 만큼 필름 사진을 담당하는 일에 있어서라면 신뢰받는 인물임이 영화에서 비친다. 다만 자주 소위 '멍 때리기'를 하는 습관 때문에 어떤 이들은 수군거리기도 한다. 월터에게는 그런 이유가 있어 보인다. 스스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별로 대단한 걸 해본 적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고서도 취미나 특기, 자기만의 경험 등을 적는 란을 모두 공란으로 해둔 그에게 인연이 찾아올 리는 없는 듯하다.



예상대로 월터가 숀을 찾아 떠난 여정은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된다. 거주지도 일정하지 않고 휴대전화도 쓰지 않는 그를 찾아 월터는 그린란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아이슬란드까지 간다. 그 여정들이 마치 월터를 기다려 왔던 것처럼, 마법 같은 일들이 펼쳐진다. 헬기에서 물건을 전달하기 위해 바로 아래 보트 위로 뛰어내리기도 하고 상어와 싸우기도 하며 소싯적 재능을 활용해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이때 코너링을 위해 양 손바닥에 자갈을 넥타이를 찢어 묶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떠나본 적 없던 월터는,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되자 곧장 어디든 몸을 싣는다. 월터에게는 처음인 것들 투성이다. 센 파도가 치는 아이슬란드 연안 어선에서의 선원들과의 대화도, 그린란드의 작은 펍에서 숀의 단서를 쥔 누군가와 우여곡절 끝에 나누는 대화도 그에게는 낯선 사람들과의 우정 어린 교류를 쌓는 과정이다.


몇 시간 뒤 착륙할 도쿄는 서울보다 조금 기온이 높다. 겨울보다는 따뜻하지만 늦가을의 찬바람이 느껴질 만큼은 된다. 이번 여행은 다분히 감정을 소진한 스스로를 위한 보상의 성격이 크다. 한 번의 여행이 인생 전체를 전혀 다른 경로로 틀어놓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그곳에서의 경험을 좋은 쪽으로 이끌 어떤 결기 같은 것을 다지고 있다. 월터가 이륙을 앞둔 헬기에 몸을 실을 용기를 갖게 되는 데에는 호감을 갖고 있는 셰릴(크리스틴 위그)이 자신에게 데이비드 보위의 'Space Oddity'를 불러주는 상상을 한 것이 크게 작용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멍 때리듯 무언가를 막연히 상상하는 일이 꼭 쓸모없는 일만은 아니겠다. 어쩐지 내게 도쿄는 그런 운명적인 사건은 아니더라도 제법 좋은 일이 벌어질 도시 같다. 무슨 노래를 들을지 고르는 동안 제법 날씨도 알맞을 것이다. 좋은 것을 보고 2026년에도 이 지면에 보다 좋은 영화를 소개할 수 있도록 해보겠다.



*본 리뷰는 기상청 소식지 <하늘사랑> 2026년 1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s://www.kma.go.kr/kma/archive/pub.jsp?field1=grp&text1=skylove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국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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