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여행이 아니면 그저 내일을 앞둔 일상이겠지

영화 '여행과 나날'(2025) 리뷰

by 김동진

여행 뒤 거짓말처럼 우연히 영화 <여행과 나날>(2025)이 내 앞에 찾아왔다. 귀국 후 일주일이 지난 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잘 믿기지 않는다. 비일상의 공간에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게 아직 비일상적으로 느껴지는. 그렇지만 돌아올 곳은 어딜 떠나든 있어야 하고, 다시 평범한 나날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문지방을 아직도 밟고 있는 기분으로 상념에 젖어 있는 채로 <여행과 나날>로 그간 미루고 있던 미야케 쇼 영화에 입문하게 됐다. 어떤 거장의 예감이, 걸작의 확신이 찾아왔다.


심은경이 연기한 '이'는 일본에서 활동 중인 시나리오 작가다. 관객과의 대화 행사에 감독과 함께 참석하기도 하고 자기 각본이 영화화된 경험이 있지만 어쩐지 자기 작업물에 만족하고 있지 못한 듯하다. 한 관객의 질문에 자기 능력이 이거밖에 안 되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답변하는 모습에서 스스로도 잘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슬럼프의 기운이 엿보인다. 영화과 교수는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말한다. 그렇게 부쩍 홋카이도(로 추정)의 눈 덮인 작은 도시에 '이'는 며칠을 지내러 온다. <여행과 나날>은 89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크게 두 개의 챕터로 분량상 거의 균등하게 이야기를 구분하고 있다. 러닝타임 순으로 앞의 것과 뒤의 것을 편의상 '여름 편'과 '겨울 편'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나는 차라리 '여행 편'과 '나날 편'이라고 해보겠다.


영화 '여행과 나날' 스틸컷


여행 편은 극중극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가 머릿속으로 골몰해 있으면서 노트에 느린 손글씨로 또박또박 쓰는 시나리오의 각 신들은 관객이 보는 영화로 장면 전환된다. '차 뒷좌석에 여성이 잠들어 있다'라고 '이'가 쓰는 순간 그다음 컷은 실제로 카와이 유미가 연기한 '나기사'가 차 뒷좌석에서 눈을 뜨는 대목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이야기는 바닷가에서 여성과 남성이 주고받는 몇 마디 안 되는 대화, 걷거나 낮은 산 중턱에서 밤 마을 풍경을 보는 시간이나, 해조류로 만든 젤리를 먹거나 폭우 속에서 바다 수영을 하거나 하는 시간 등으로 느슨하게 구성돼 있다. 처음 만난 두 남녀는 가까워지는 듯하면서도 제법 거리를 유지하고,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다가도 여행을 끝마쳐야 하는 여행자의 운명처럼 얼마 뒤 헤어진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여행과 나날>을 보는 관객들이 보고 있던 저 극중극은 영화 속에서 (대학교 강의실로 보이는) 관객과의 대화 현장으로 장면이 전환되는 순간 영화과 학생들이 함께 보고 있던 영화임이 밝혀진다. 어떤 이는 긴장감이 에로틱하게 느껴졌다고 하고 어떤 이는 어둠과 고독에 대해 말하며 또 누군가는 각본가인 '이'에게 시나리오를 쓸 때와 달리 실제 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고 오히려 질문을 한다. 여행 편 속 그 영화의 서사 또는 결말 자체가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대신 뒤이은 '나날 편'과 비교되거나 대칭되는 방식으로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예를 들면 해안가 웅덩이 안에 죽어 있는, 머리가 뜯겨 나간 물고기. 남녀는 죽음을 곱씹듯이 그걸 내려다본다. 나날 편에서 여행 온 '이'와 여관 주인 '벤조'(츠즈미 신이치)가 연못의 잉어 들을 비슷하게 쳐다보는 장면에서는 죽음의 이미지가 아니라 호흡하며 펄떡이는 생의 박동이 보인다.


영화 '여행과 나날' 스틸컷


나날 편에서 '이'는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온 탓에 가는 호텔마다 만실이고 누군가의 소개를 받아 인적이 드문 곳의 여관 문을 두드린다. 객실이 나뉜 숙소라기보다 방의 구분이 딱히 없어 보이는, 일체형 공간이 거실이자 주방이자 창고이자 일터처럼 기능하는 곳. '벤조'는 무심히 이불 같은 걸 내어주거나 불을 피워주거나 하면서 이내 코를 골며 잠든다. 앞선 여행편의 극중극에서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누던 것과 비슷한 양상으로 나날 편에서 '이'와 '벤조' 역시 느슨한 대화를 나눈다. 직업이 뭔가?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무슨 이야길 쓰고 있나? 뭘 쓸지 찾고 있습니다. 여길(여관) 소재로 이야길 써보면 어떨까? 시나리오 작가답게 '이'는 순간 '벤조'에게 (이미 공간 곳곳의 그림이나 글씨, 낙서 같은 것을 관찰한 뒤) 인터뷰하듯 질문을 꺼내기도 한다. 스토리텔링을 술술 풀어놓지 못하고 말을 아끼는 '벤조'를 보며 '이'는 사적인 과거사를 직감하고 함께 말을 아낀다. 며칠을 묵는 동안 어떤 날은 뭔가를 끼적거리거나 생각에 잠겨 있고 어떤 날은 '벤조'가 일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도 하고 내어준 식사를 공손히 해치우기도 한다. 어떤 날은 물고기를 잡겠다며 '벤조'가 안다는 어느 집 인근 연못을 향해 길을 나섰다가 난데없는 해프닝 같은 것(?)을 겪는 두 사람의 모습이 촌극처럼 펼쳐진다.


요지는 <여행과 나날>에서 여행 편에서도 나날 편에서도 대단한 일이 딱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힐링하듯 혹은 도망쳐오듯 눈 덮인 시골 마을에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이'가 갑자기 슬럼프를 끝내고 멋진 각본을 집필하는 엔딩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며, 창작에 대한 고민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무언가 쓸 수 있을 것도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장면이 영화의 사실상 마지막인 셈이다. 이 대단한 일 일어나지 않는 영화가 내게는 그래서 작지만 큰 위안이 됐다. 당신 뭔가 잃어버린 적 없이 언제나 네 안에 가지고 있었다고. 도망친 게 아니라 치열하게 떠나온 거라고. 꿈인지 생시인지 일상인지 비일상인지 모를 이 시간을 얼떨떨하게 잘 건너가 보자고. 웃기고 즐거운 것들만 있으면 인생 재미없지 않겠냐고. 대단한 희망도 절망도 아니고 그저 내일은 불완전한 언어의 한계를 딛고 말을 생각하고 감각하는 시간을 산책으로 조금 더 채워보자고. 훌쩍 떠난 어딘가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감각은 기억에 남을 것이며 곧 그게 여행이겠다고. 어느 장면을 포착해도 깔끔한 프레임과 초점 안에 인물과 풍경이 조화롭고 아름답게 담긴 이 영화의 모든 컷들을 여행자의 마음으로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오랜만에 찾은 이수의 독립영화관 출구를 나선다.


강물이 그림을 못 그리는 나 대신 물결로 무언가를 그려주고, 바다와 눈밭이 어두운 상영관에 앉은 나 대신 햇빛을 내려주고, 스크린이 나를 볼 수 없는 나 대신 거울이 되어준다. 일상은 주변의 친숙한 것에 이름을 붙이고 익숙해지는 일이지만 여행은 그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와 낯선 것으로부터 성장의 감각을 느끼는 일이다. 물론 대단한 구원 같은 건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건 영화도 문학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다시 태어나고 싶어도 그럴 순 없으니 어딜 떠나야만 간신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고 쉽사리 죽을 수는 없으니 잠깐이나마 스위치를 끄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보기로 한다. 갑자기, 어쩌다 보니, 그냥, 우연히 같은 단어들의 뒤에 도착해 있는 저 헐렁한 여백과 낯선 것들은 여행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걸 만나야만 어제보다 조금 다른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됨을 안다. 좋은 방향일지는 물론 내 몫이다.

요약될 수 없는 슬럼프를 설명하지 않고 두 사람과 두 계절을 섣불리 가까워지게 하지도 않으면서, 삶도 죽음도, 희망도 절망도, 꿈도 현실도, 어느 쪽도 긍정해버리지 않으면서도 <여행과 나날>은 말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나에게 말하지 않거나 말할 수 없는 순간에도 누군가 나 대신 언어를 발화해 주는 듯한 경험을 준다. 수전 손택은 'The Decay of Cinema'라는 뉴욕타임스 기고(1996)에서 어떤 영화는 관객을 납치한다고 썼다. ("You wanted to be kidnapped by the movie -- and to be kidnapped was to be overwhelmed by the physical presence of the image.") 여행을 막 다녀온 내게 <여행과 나날>은 그런 영화였다. 도쿄 여행 직후 홋카이도 어딘가에 잠시 떨어졌다 돌아온 기분으로 터널 같은 상영관 출구를 나섰다. 곧 겨울이다. 또 곧 다시 여름이겠지. (2025.12.19.)



영화 '여행과 나날' 국내 포스터

*인스타그램: @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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