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Jan 23. 2017

고향, 진정한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곳

<브루클린>(2015), 존 크로울리

존 크로울리 감독의 <브루클린>(2015)을 내가 2016년 상반기 최고의 외화로 꼽았던 이유는, 영화 속 인물의 선택과 그 선택의 대상이 되는 (주로 두 가지의) 것들이 우열과 상하의 것이 아니며 그것이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도 비슷하게 주어질 법한 삶 그 자체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과 시나리오 모두 단 한 번의 플래시백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차분하게 '에일리스'(시얼샤 로넌)의 성장을 따라가는데, 이것이 조금도 심심함과 평범함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실은 다소 소심하고 어떤 시점까지는 일정 수준 수동적이기까지 한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든 발자취는 아름답고 또 뭉클하다. (절반은 주인공처럼 실제 아일랜드 출신인 시얼샤 로넌의 연기 덕분이며, 나머지 절반은 피상성이나 무게감을 완연하게 뺀 원작과 그를 충실히 따른 각색 덕분이다.) 그리고 중요하게도, '에일리스'라는 캐릭터의 성격과 행동 양식,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은 꾸밈없음이 그 어떤 치장과 겉치레보다 아름답고 예술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소박하고 단선적인 서사는 자극을 애써 요하지 않으면서도 시대성과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을 증명한다.'



아일랜드 작가 콜럼 토빈의 어릴 적 경험과 기억에서 우러나온 담백하고 꾸밈없는 원작 소설은 '성장'이라는 테마를 거의 모든 영화가 내포하고 있음에도 <브루클린>의 그것을 좀 더 귀하게 만든다. 원작에 없는 부분을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인 것처럼 조금의 이물감도 없이 덧붙여 의미를 배가할 줄 아는 각색은 시나리오 작가로서 닉 혼비라는 이름에 신뢰감을 더하고, 그 배경과 공간을 누비는 '에일리스'의 캐릭터는 대사 없이도 시얼샤 로넌이라는 배우가 왜 탁월한 배우인지를 재확인시켜준다. 여기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다름 아닌 촬영인데, 정확한 순간에만 드물게 활용된 익스트림 롱 쇼트와 주인공의 시점 쇼트는 인물이 겪는 내적 혼돈을 관객에게 슬쩍 내비치면서도 캐릭터의 평범해 보일 수 있는 특성을 보편성으로 만든다. 이 영화가 즐겨 활용하는 바스트 쇼트는 애써 클로즈업하지 않아도 여백과 여유를 아는 원작처럼 심리 묘사와 상황 묘사에 힘을 보탠다.


"어머니나 친구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는 까닭에 미국에서 보낸 나날들이 고향에서 보내는 이 시간과는 도저히 연결될 수 없는 일종의 환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둘인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브루클린에서 두 번의 추운 겨울과 힘들었던 숱한 나날에 맞서 싸우고, 그러다가 사랑에 빠졌던 한 사람과, 어머니의 딸로서 모두가 아는, 아니 모두가 안다고 생각하는 또 한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느낌."

(<브루클린>, 콜럼 토빈 지음, 오숙은 옮김, 312쪽, 2011, 열린책들.)



이 영화에서 이민은 주인공의 음울한 상황과 심경을 상징하지도 않으며 사회적 문제나 해결해야 할 숙제로 비춰지지도 않는다. 단지 더 넓은 사회와 세상으로 걸음을 디디며 주체성과 자아를 찾아가는 주인공을 세심하게 관찰하기 위한 소재로서만 기능한다. '토니'(에모리 코헨)와 '짐'(도널 글리슨), 미국 브루클린과 아일랜드 에니스코시로 대변되는 선택의 기로에서 '에일리스'가 겪는 내적 고뇌와 자신을 찾기 위한 분투는 그 가운데서도 특별하다. 계단이 있는 복층 건물, 집의 주인인 중년 여성, 언니이자 선배로 자리하는 주변 인물, 바닷가, 남자, 무도회장, 가족. 영화의 많은 것들은 조금씩 다른 양상과 궤적으로 각기 다른 장소에서 서로 병치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 자체는 급작스러울지 몰라도 그것은 분명 단호하게 내려진 결정이며, '나'로서 자신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삶의 계절은 대체로 비슷하더라는 포용의 산물이기도 하며, '나'의 과거를 새로 쓸 '나'만의 존재를 만나는 곳이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써 내려가게 될 상징적 고향이자 터전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그리하여 <브루클린>은 인생을 살면서 언제고 반드시 마주하고야 말 선택의 기로에 대한 영화다. 지나온 과거가 어떤 의미로 내게 존재했는지,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느 누구와 무엇으로 인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응시할 줄 아는 순간에 주체적인 선택은 비로소 만들어진다. 켈리 부인의 앞에서 "제 이름은 에일리스 피오렐로예요"라 단언하는 '에일리스'의 외침은 바로 그 순간에 나온다. 흔하고 상투적인 멜로와는 그 결을 달리하는 이유다. (★ 9/10점.)


<브루클린(Brooklyn, 2015)>, 존 크로울리

2016년 4월 21일 (국내) 개봉, 111분, 12세 관람가.


출연: 시얼샤 로넌, 에모리 코헨, 도널 글리슨, 짐 브로드벤트, 줄리 월터스, 피오나 글라스콧 등.


수입/배급: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브루클린> 메인 예고편 (링크)


<브루클린> IMDB (링크)


<브루클린> 로튼토마토 (링크)




*좋아요와 덧글, 공유는 글쓴이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슬픔이 사라지지 않아도 삶은 살아진다는 관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